[기독일보=신학] 지난해 10월 한국조직신학회 신임회장으로 김재진 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원장)가 선임됐다.
김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둔 올해, 1973년 스위스 '로이엔베르크 협정(Leuenberger Konkordie)'에 따라 집필된 『개혁된 유럽(Europa Reformata)』을 번역 출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취지를 듣고자, 지난 3일 김재진 박사를 자택에서 만났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편집자 주 : 인터뷰 내용이 긴 관계로 주제별로 게재합니다>
- 신학생들이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시위로 표현하는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사회·문화개혁, 정치개혁으로까지 확장이 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의견이 조금씩 달랐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 농민전쟁을 지지한 토마스 뮌처와 교회 안에서 생겼던 츠빙글리를 쫓는 재세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신학개혁' 혹은 '교회개혁'을 '정치, 사회개혁' 혹은 새로운 '교파결성'으로까지 일탈한 예입니다.
그러나 당시 루터의 기본적인 입장은 좋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부정적인 것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예배의식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핀란드 루터교회는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와 예배의식과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신학적 혹은 신앙적인 개혁을 떠나서, 개혁을 체제개혁으로까지 확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곧 신학개혁이 농민 봉기로까지 확산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일반 지식인들은 막연하게 농민들의 혁명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국가혼란'을 야기 시켜 '체제전복'을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근년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던 촛불시위대원들이 청와대를 점령하여 국가 최고 통치권에 도전하였던 것은, 국가의 기본체제를 무너뜨리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사를 정당하게 표현하는 '표현의 자유'에 속한 것이 아니라, 국가 통치권에 대한 거부 내지는 도전입니다. 루터는 교회와 사회를 긍정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한 체제전복으로까지 가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루터(M. Luther)나 칼뱅(J. Calvin)도 우리들의 신앙에 위배되는 일을 국가가 강요할 때는, 기독교인은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가 국민의 신앙을 억압해서 자기 신앙을 지키지 못하도록 할 경우에는, 그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것, 이것은 신앙적 순교입니다.
그러나 개혁을 빙자하여,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모반입니다.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기까지 저항한 것, 이것은 순교로서 깊이 평가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신앙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기존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따라서 루터나 칼뱅도 그 당시에 신앙을 빙자해서 공권력이나 국가의 기본체제까지 흔들어 놓는 것은 잘못됐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누구나 국민으로서 정당한 자기 의사를 발표할 수 있지만, 공권력 파괴로까지 가는 건 하나의 모양만 다른 또 하나의 악한 세력입니다.
- 국가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임이지만 국가권력에 빌붙어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부류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교회가 국가정치에 참여해서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소위 교회정치신학이죠. 그것이 긍정적으로 되면 모르는데 부정적으로 된 것이 바로, 히틀러 당시에 독일교회였지요. 교회와 정치와 결탁해서 결국 그 당시 종교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독일교회가 독재자 히틀러를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반대한 것이, 칼 바르트가 기초한 '바르멘 선언'이었고, 본회퍼의 투쟁이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항상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 있는 제사장 그룹이라는 건, 어느 종교에든지 항상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일종의 종교적 기득권자들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은 국가에 속해 있는, 일종에 종교기관 혹은 종교 공무원들이지요.
놀라운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예언자들의 선포가 남아있지, 그 당시 제도권 세력에 빌붙어 먹고살던 제사장들의 얘기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당 시대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들에게 세습이 되었지만, 예언자 직은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불러서 당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제사장들은 제도권 조직 속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도 예언자적인 목회자가 있고, 제사장적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대형교회에서 '목회자 세습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형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들이 듣기 좋은 소리 하니까, 죄에 대하여 부담감을 주지 아니하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아니겠어요?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니 모두 그곳으로 몰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아론처럼 말입니다.(편집자 주: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을 원망하며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에게는 반발하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하니, 너도나도 자신들이 아끼는 금은 폐물을 아론에게 바쳐서, 대형교회 세운 것 아닙니까? 그런 성경의 현상이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통령한테 가서 '대통령 잘 하십니다.' 이런 소리나 하고,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초대받은 것을 자랑하는 목회자가 많습니다. '나단' 선지자처럼 최고 권력자인 '다윗'한테 가서, '당신이 바로 그 죄인이요' 말할 수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은 한, '나단'처럼 행할 수 없지요.
그래서 항상 국가체제의 말기에는 '예언자'가 나타나고, 국가는 그러한 '예언자'를 죽이고, 그래서 결국 역사의 종말을 고(告)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고 조직이고 망할 때는, 항상 '충신'의 목을 베든지, '예언자'들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평안하다. 각하! 잘 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수두룩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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