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신학] 지난해 10월 한국조직신학회 신임회장으로 김재진 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원장)가 선임됐다.
김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둔 올해, 1973년 스위스 '로이엔베르크 협정(Leuenberger Konkordie)'에 따라 집필된 『개혁된 유럽(Europa Reformata)』을 번역 출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취지를 듣고자, 지난 3일 김재진 박사를 자택에서 만났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편집자 주 : 인터뷰 내용이 긴 관계로 한 질문씩 게재합니다>
- 한국교회도 기본으로 돌아가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지요?
예, 맞습니다. 이 책의 서론에 보면, 유럽의 변화는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Europa Reformata: 유럽이 개혁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럽 전체 사회의 모든 것들이 종교개혁으로부터 변혁되었습니다. 즉 유럽개혁의 시발점이 루터의 교회(종교)개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초대교회의 박해처럼 수많은 개신교인들과 농민들이 사형당하고 목 매달리는 일을 겪었습니다. 예컨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크리스천 3세가 수많은 개신교 추종자들을 화형 시키거나 목매달아 죽였습니다.
이렇듯 '종교개혁'은 다른 개혁보다도 가장 힘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치, 경제, 문화 개혁에 비하여 가장 힘든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러나 참 신앙으로 교육되고 무장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으니, 나도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자 - 본회퍼(D. Bonhoeffer)가 "나를 따르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것이 '순교적 삶'이요, '삶으로 드리는 산제사(living sacrifice)'입니다. 이러한 '산제사'는 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및 교회개혁이 중요한 것입니다.
-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고 교회에서 많이 듣지만 사회에 나가면 그런 모습이 없이 무늬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간혹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면, '구제'를 생각합니다. 예컨대 가난한 가정에 연탄 나눠주는 것, 고아원을 방문하여 위로금이나 상품을 전달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상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행하지 말고, '~ 하라고 하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가르쳐야 할 신학교가 '소위 학문적 신학'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신학교에서 배운 목회자들 역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니,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윤리적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세상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윤리대로 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아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감사하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윤리(倫理)'라는 잣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윤리'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면, 이 세상에 어느 누가 그 잣대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이 세상에 지상낙원을 이루려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게 얘기하면 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라'고 했으며, 그대로 사는 것, '머리가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 했으며, 그 말씀대로 섬기는 삶을 사는 것, '거짓말 하지 말라' 하였으니, '거짓말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연탄 몇 장 배달해 주었다 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고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평가하는 비그리스도인들의 평가도 잘못된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가 생각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생각은 이기심(利己心)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행사 위주로 연말에 구제 조금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그거야말로 신앙적 자기기만입니다.
우리나라에 초대 선교사가 와서 선교를 할 때는, 그 당시 우리나라가 못살았으니 당장 우선'가난에서 해방해야 했기에' 구제에 전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지나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나는 제사 지내야 되니 못 돕겠다'고 지나친 사람처럼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구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구제'는 기독교 신앙과 정신 속에서 나온 삶이지, 구제 자체가, 곧 기독교 사랑인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장 궁극적인 것은, '생명', 곧 '죄 용서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생'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가 기복(祈福) 종교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선포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모든 사회참여, 사회봉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떠난 것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와'종교적 선행'에 불과합니다.
예컨대 기독교가 60-70년대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것은, 교회가 정치하겠다고 덤벼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요 3:16)에 역행해 집권자들이 법을 어기고 국민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에 대항하여 국민의 인권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 변질되기도 했습니다만...
예컨대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해서 장기집권하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니까 잘못되었다고 외친 것이고, 반면에 집권자들은 바른 소리 한다고 세례요한을 헤롯이 죽인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참 하나님의 종들은 '예 할 때, 예하고, 아니요 할 때, 아니요'라고 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대해 선포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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