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 이영인 기자] 한국 초기 선교에 공헌한 선교사들은 적지 않다. 그들 중 자신의 생명을 잃은 이들, 부인을 혹은 자녀들을 잃은 이들이 적지 않다. 빈튼(C. C. Vinton, M.D) 선교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의료 선교사로 내한한 빈튼은 제중원에서 진료하였고, 자주 지방 순회진료를 하면서 복음 선교에 헌신했다. 또한 주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회 서기로 다년간 봉사하면서 1891년부터 1898년까지 있었던 희의록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그 기간 동안 북장로교회가 행했던 사역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 선교사다.
그는 1891년 내한하여 190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할 때까지 의료 사역을 하면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했다. 그것은 아들 Walter(1살)와 Cadwilard(4살), 그리고 딸 Mary(6개월) 세 자녀를 조선땅 양화진에 묻은 일이다. 1903년에는 부인 Lefitia마저 생명을 잃어 자녀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 같이 묻혔다.
저자 김인수 교수(전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가 빈튼 선교사의 편지를 번역, 출판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 작은 일을 통해서라도 그가 치른 값비싼 희생에 대해 한국 교회는 빚을 갚아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괄목할만한 업적은 못 남겼다 해도 가족 네 명의 생명을 잃으면서까지 한국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를 한국 교회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한때 제중원 원장으로 사역했고 조선성서공회 창설에 공헌했으며 기독교신문 The Christian News 편집주간으로 사역했다. 또한 선교잡지 The Korea Field, The Korea Mission Field 편집에 수고했다. 그리고 조선 나병환자 실태 조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부산 나병원 설립에도 공헌했다. 그는 190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1936년 뉴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책 전반부는 빈튼 선교사가 엘린우드(F.N. Ellinwood) 박사(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실행이사)에게 보내는 선교편지를, 후반부는 그 영문 원본을 차례대로 싣고 있다.
조선에 도착한 직후인 1891년 4월 10일자 편지를 보면 "...배설물과 비위생적인 물질에서 나오는 병균과 그리고 끊임없이 암반 위 토양층 아래로 스며드는 쓰레기들에서 나오는 병균과 세균들이 득실거립니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당시 조선의 의료상황은 아주 형편없었다. 하지만 같은 편지 내용 중 "...한국인들은 제가 확신하건데 아주 쉽게 복음을 받아 들일 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라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부흥을 암시하기도 했다.
한국 선교를 위해 가족 넷을 잃은 선교사는 빈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는 한국 선교 역사의 숨은 보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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