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목회는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사람이 배제된 목회는 존재할 의미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습니다. 목회를 하는데 목회 대상이 없다면 목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생기면 교우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만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어제 교회의 어떤 형제와 전화 대화 내용입니다.
"형제님, 김목사입니다." "어... 목사님 왠일이십니까?" "오늘 아침 큐티 중 형제님이 생각이 많이 나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별 일 없으시죠?" "아.........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신앙생활 문제 없으신가요?" "아............. 네, 뭐 특별한 문제는...없는 것 같습니다." "제자훈련 때 큐티 잘 하셨는데. 요즘도 여전히 큐티 잘 하고 계시지요?" "아......네. 뭐....... 요즘은 조금... 게을러져서.... 열심히 큐티하겠습니다." "형제님 위해서 기도할께요. 늘 평강한 삶을 이루시도록요." "아.....네...... 감사합니다." "그럼 평안하시구요. 다음에 또 전화 드릴께요." "네...... 근데...... 목사님, 저......제가 뭐 잘 못한 일 있나요?" "아니요,전혀 그런 것 없으세요." "근데... 목사님, 그 말씀 하시려고 전화하신건가요?" "네, 형제님의 영적 삶을 도와드리고 기도해 드리려구요." "아......네......뭐"
목사가 전화를 하거나 만나자고 하면 영적인 일 이외의 어떤 특별한 이슈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시는 교우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전화해서 영적인 삶에 대해서 물어보고 힘내시라고 전화하면 어떤 분은 의아하게 여기기까지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다루는 대화 내용이 '기도생활' '큐티' '성경읽기' '은혜를 누리는 삶'에 관련된 것이 다라면 그것 때문에 전화할리가 만무하다고 여기시는 분도 계십니다. 교우와의 만남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삶'에 대한 것이 주된 대화의 내용이라면 헤어질 때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시는 분도 있습니다. 마치 "뭐, 이런 것 때문에 만나자고 했어?"라고 여기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와의 대화가 '의학'이나 '건강'에 한정될 수 밖에 없듯, 목회자와 대화에서 '영적인 삶'이 주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목회자와 '영적인 삶'을 나누는 것이 왠지 이상해진 현실이 더 이상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삶'을 전제로 합니다. 영적 감각이 흐려지면 신앙생활은 흥미가 크게 감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청각이 흐려짐으로써 음악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는데 어려움을 느끼듯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인 감각'을 늘 체크업해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 깊은 교감은 '영적인 삶'이 기본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영적 감각'을 갖추는 것이며, 그 영적 감각이 둔화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체크업이 필요합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들을 질병에서 회복시키는 일 뿐만 아니라, 다시는 같은 질병으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환자를 돕는 자라 생각합니다. 몸이 아파서 만나는 일을 뛰어넘어, 그 질병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의사를 만나면 마음이 든든해 집니다. 목회자도 같은 선상에서 그 역할을 세워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영적인 감각을 늘 예민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영혼을 세심하게 돌보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소울 케어링이 성령께서 제게 부여하신 역할임을 오늘 아침에는 강하게 느낍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2)"
글ㅣ김지성 목사(LA 글로발선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