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와 6.25참변, 군사정권과 사회적 혼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던 20세기. 올해로 팔순이 된 손인화 목사에겐 흐르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흔적들이다.

그는 군목으로 25년, 이민목회로 18년을 보내면서 총 368명의 장례식을 집례했다. 왠만한 큰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쉽지 않을 368명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인간의 유한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6.25 전쟁통에 죽은 사람을 트럭에 싣고 그 위에 산 사람이 앉아 피난을 가던 때, 그는 피끓는 19세 청년이었다. 삶과 죽음은 어쩌면 그렇게 맞닿아 있는 지도 몰랐다.

일제치하와 전쟁 등 모진 고생 끝에도 살려주신 것이 감사해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됐다.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발을 절며 역을 누비는 군인들이 눈에 들어온 건 졸업 후 서울역, 용산역으로 노방전도를 다닐 때다.

수제비, 눈깔사탕으로 공궤… 자식 같던 군인들

“당시만 해도 군대에 가는 대부분은 편모 집안이나 극빈자들이었습니다. 시설도 충분치 못해 칼 하나로 땅을 파 막사를 지어 생활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군인들이 직접 시위도 하던 그런 시절이에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 때 군인의 모습이란 그랬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다 떠나 군대에 들어온 외로운 이들을 섬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군목 자리. 그 곳에서 그는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수제비를 끓여주고, 때로는 봉급을 털어 군인들 손에 쥐어주며 목회자의 삶을 시작했다. 항상 호주머니에 눈깔사탕을 넣고 다니며 전방에서 보초를 서는 장병들의 입에 넣어주면서, 눈물젖은 경례도 많이 받았다.

예수님의 가르침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 20:28)”는 그의 60년 목회인생의 큰 지침이 된 말씀이다. 은퇴 목사로 살아가면서 늘 아쉬운 것도 “더 가르치지 못해서”가 아닌 “더 섬겨주지 못해서”라는 그.

잊을 수 없는 월남전 “故 강재구 중대장 그리고 기적”


 

 
▲월남전 당시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손인화 목사.
 
 

1965년 맹호부대와 함께 월남으로 파견돼 제 1연대 군목을 지내고 육군 본부 군종감실 선교담당관, 수도경비 사령부 군종참모, 육군대학 군종 부장 및 동대학 교수, 육군 본부 군종 과장 등 1980년 정년 퇴역까지 손 목사의 목회 전반기는 국가를 지키는 군인들을 섬기는 일이었다.

월남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화는 故 강재구 중대장의 전사 이야기다. 월남 파병 ‘맹호부대’를 이끌었던 인물로 훈련장에 떨어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현장에 있던 다른 병사들을 구하고 전사했던 전설적 인물, 강재구 중대장. 수류탄 투척 훈련 중 한 병사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자신의 몸을 던져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당시 군목으로 있었는데, 그의 조각조각난 몸을 수습해 널판을 부쳐 다리를 만들고 군복을 입혀 장례를 치렀습니다. 당시 6살 난 아들을 데리고 온 강재구 중대장 부인의 오열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 일화는 월남전 당시 월남 금성 명예훈장이라 불리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일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기적 같다.

“월남 파병 시절, 늘 장병들 기도만 해주고 보내는 것이 마음이 좋지 않아 방탄 조끼도 없이 작전지역으로 따라갔습니다. 폐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능선을 따라 쭉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전부 그 자리에서 엎드렸고, 적진의 공격이 분명하다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이후에는 기척이 없어 그대로 고지로 올랐습니다.”

고지에 오르자 월맹군 3명이 쓰러져 있었다. 한국군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적당한 거리에서 전멸시키려고 수류탄을 던진 모양인데 그 수류탄이 나뭇가지에 부딪혀 자신들에게 떨어진 것이다. 당시 손 목사와 함께했던 군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며 고지에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 고지에서 북한제 AK소총 및 무반동총(대전차포), 삐라 등이 발견돼 북한이 월맹을 지원했다는 최초의 증거자료를 확보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조선일보는 군종을 앞세워 기도하고 전투를 시작했던 맹호부대의 활약상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 일로 고지에 올랐던 병사들이 모두 훈장을 받게 됐는데, 목사님께 훈장을 주지 않으면 자기들도 받지 않겠다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손 목사에게도 명예훈장이 주어졌다.

그래도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 때의 월맹군도 돌봐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 때가 때이니 만큼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당시 숨을 거둔 월맹군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가족사진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마음에 걸린다. 5년 전 맹호부대가 진을 쳤던 지역에 다시 방문하게 됐을 때는 가슴으로만 품고 있던 아쉬움이 더 커졌다. “가족사진이라도 가지고 왔더라면, 유가족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요….” 늘 더 해주지 못해 아쉬운 목회자의 마음이다.

‘늘 더 섬기지 못해’ 아쉬워

이민목회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자들을 위한 목회라는 면에서 군인목회와 상통한다. 1985년 미국 땅을 밟아 버지니아장로교회에 부임하고 첫 예배를 드릴 때 28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인연이 됐던 백악관 특별 보좌관(레이건 대통령 당시) Thomas R. Donnelly가 축사를 전해 지역 한인사회에서도 화제가 됐었다.

전임 목회자가 죽고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진 교회를 맡아 80명, 150명, 300명으로 키워가면서 어느새 지역에서도 규모있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 비결 역시 “섬김”에 있다는 것이 손 목사의 말이다.

“어떻게 하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해 주는 모습, 이민목회도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채권을 발행해 아름답게 지은 버지니아장로교회 전경.
 
 


이민목회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일 중 하나가 교회당 건축이다. “교회 채권을 발행해 예배당을 지은 최초 미주한인교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모두 채권을 사서 일주일 만에 50만 달러가 모였고 공사가 무사히 진행되어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당시 교인들이 고생고생하면서 번 돈을 건축헌금으로 바치라고 하기가 너무 미안해서 생각해 낸 것이 ‘채권’이었다. 채권을 발행해서 건축헌금을 하려는 마음만 받고 15년 20년이 지나면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회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도 채권을 많이 구입했다. 교회규모도 주변환경과 잘 어울리게 아담하게 지었으며, 장애인들도 불편하지 않도록 계단이 없는 형태로 지었다. 이런 점들이 참작돼 페어팩스카운티로부터 ‘아름다운 교회 상’을 받기도 했다.

남은 인생 기도제목은 하나님 영광 가리지 않는 것

목회를 하면서 늘 마음 속에 두는 것은 마태복음 20장 28절이다. “지도자로서 가르치고 교인들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나에게 목회는 ‘섬겨주고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사 되고 지금까지 60년을 지나오면서 목사로서 교인들을 더 섬겨주지 못해 늘 아쉽고 미안할 뿐입니다.”


 

 
▲진중세례식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 손인화 목사.
 
 

그래서 팔순의 나이에도 일년에 한 번씩 다녀오는 진중세례식 만은 놓칠 수 없는지 모른다. 많으면 3천명씩 세례를 주고 오는 진중세례식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다. 지난 달에는 해군 진중 세례식에 다녀왔다.

“군인들을 전도하고 세례를 주려고 일부러 미국에서 목회자들이 왔다는 말에 장병들이 한 쪽에서는 세례를, 다른 한 쪽에서는 축복기도를 받으려고 우르르 몰려 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가끔 전율이 올 정도로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신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군대 군목제도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일, 그런 일에 동참하는 일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물었다. 손 목사는 “앞으로 남은 인생이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란다.

“목사는 성도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한 교회만 섬기도록 따라주고 사랑해준 성도들에게 감사하고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앞으로 남은 인생이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니까요.”

<손인화 목사 약력>

1956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졸
1974 일본동경신학대학 대학원 졸
1985 Kingsway Christian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 졸(종교교육학석사)
1990 동대학 명예신학박사
1956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목사 안수
1965 파월 맹호부대 종군목사
1969 수도경비사령부 군종참모
1974 육군대학 군종부장 및 동 대학 교수
1977 육군본부 군종과장
1982 숭의여자대학 교목실장 및 동대학 교수
1985 버지니아장로교회 담임목사
1989 워싱턴지역 한인교회협의회 제 15대 회장
1990 미주한인장로회 동노회 노회장
1991 워싱턴 '정오의 샘터' 선교회 제 3대 이사장
1998 국제전략 화해연구소 초대이사장
1999 워싱턴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제 2대 이사장
2000 미주한인장로회 제 26대 총회장
2001 세례성령복음화협의회 제 3대 총재
2011 워싱턴지역 한인교회협의회 증경회장연합회 회장

<상훈>
대한민국 대통령상
월남공화국 금성명예훈장
대한민국 보국훈장 삼일장
대한민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공로상
미주(해외)한인장로회총회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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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화 #버지니아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