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손상웅 목사] 1882년 7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토착 유학자이자 부농의 가정에서 출생한 손정도는 6세 때 사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였다. 1902년 겨울 23세인 손정도가 관리시험을 치르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조목사 사택에 머무르면서 조목사가 설명한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교리를 듣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다음날 조목사의 도움으로 상투를 짤랐다.
손정도는 평양을 포기하고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 1874-1963)과 고향으로 가 사당을 부수는 등 신앙인의 자리를 지켰다. 어느 날 밤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손정도는 속옷바람으로 집을 나와 눈덮힌 산에서 철야기도를 하다 실신하는 등 믿음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이후 고향을 떠난 손정도는 평양 문요한 선교사 집에서 일하다가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고 1908년에 본 학교를 졸업하였다.
13세에 결혼한 2살 위인 박신일이 고된 시집살이를 박차고 남편 손정도를 찾아와 평양 기독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남편의 학비를 마련하였고, 진실과 성실등 두 딸을 양육했다. 손정도는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단신으로 서울 유학길을 택하더니 1909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 신학대학) 을 졸업하고 평양 남산현교회와 진남포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서울은 손정도에게 전덕기와 이승만등과 사귀면서 민족운동에 발을 디디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제의 학정에 못 이겨 조선민족이 만주로 이주해 감으로 선교사 파송이 시급하였던 때인 1910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는 손정도를 청국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그는 중국어를 익힐 목적으로 그해 7월 북경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만주의 안동, 길림을 비롯한 간도지방을 담당한 순회 전도자로 활동하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1912년 3월 5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제5회 미감리회 연회에서 손정도는 선교보고를 하였는데 본 연회는 손정도를 만주 봉천 북지방과 할빈 남방을 포함한 북만주 선교사로 재 파송하였다. 손정도는 200명의 교회를 개척하고 3층 교회당을 건축하고 교인묘지를 마련하는 등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을사보호조약과 한일합방을 강행한 가쯔라(1849-1913) 수상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던 일제가 손정도를 체포하여 고문후 풀어주더니, 황해도 금광을 습격하여 북간도의 한인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기를 대주려 하였다는 혐의로 손정도를 다시 체포하여 거주제한 1년이란 행정처분하에 전남 진도에 감금하였다. 그는 영어의 몸이었지만 진도에서 복음 전파와 독립정신 고취에 열중하였다. 1913년 감리회 제6회 연회는 손정도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30원의 선교비를 지급하기로 결의하였다면 몸은 진도에 있었지만 그는 만주선교사였다.
1914년 일제에서 풀려난 손정도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한 후 정동교회로 부임하여 1918년까지 목회하였다. 1917년에는 교인수가 약 2300명을 헤아려 가장 큰 교회로 부흥하자 교회 중축공사를 하였고,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을 없애고 교회 안에 의자를 놓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것은 손정도의 업적에 대한 찬사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목회기간 유관순이 본 교회를 다녔다면 그녀의 대한독립만세는 손정도의 나라사랑의 열매였다. 그러나 손정도는 일제의 압력으로 1918년에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고 평양으로 이주하였지만 사실상 이는 휴직 및 제명이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3년간 상해에서 손정도는 임시 의정원 의장을 맡아 독립군 무기기금 모금운동과 대한 애국부인회일에 관여하는가 하면 1919년 박은식과 함께 대한교육회를 조직하고 서무를 역임하였고, 동년 대한적십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1920년에는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극동임시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21년에는 만주 길림으로 간 손정도는 농민합작사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투쟁 기반과 민족 대동단결에 총력을 기울였고, 1922년 김구선생과 함께 조국광복을 위하여 7개년 동안 1만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할 것을 목적하여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였다.
손정도는 길림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여 동포들을 신앙으로 위로하고 억울한 사람을 해결해 주었다. 그 중에 김일성 전 주석도 있었는데 그는 손정도목사를 국부, 생명의 은인, 친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부르며 고마워했다. 손정도는 필생의 사업으로 간도 근처 액목현에 3천일경되는 농토를 구입하여 만주에 흩어진 동포들을 이 곳에 정착시키고 독립운동을 기하려 하였다. 손정도는 교회에 학교도 세워 교육운동도 하였다.
손정도는 1931년 2월 19일 길림에서 50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타향에서 위궤양으로 병사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신일여사와 장녀 진실, 차녀 성실, 장남 원일(해군 참모총장 및 국방부장관 역임), 차남 원태(의사), 3녀 인식(이대 교수,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회장, 한국YWCA 회장)등 2남 3녀가 있었다.
1962년에 와서 고인이 된 손정도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2001년에는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가 서영훈 전 국무총리 주로로 발족하였으며,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손정도목사의 독립운동과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고, 2007년 4월 국가보훈처는 손정도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던 것은 나라사랑도 (문화)선교라는 로잔언약을 동의한 크나큰 사례가 될 것이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