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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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 별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별이었다. 이 별을 찾으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였는지를 밝혀내야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뚜렷한 실마리가 없다. 이것이 베들레헴 별을 찾는데 커다란 어려움이다. 예수님의 탄생 날짜에 대해서 3세기 초까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 3월 21일, 3월 28일, 4월 2일 혹은 4월 19일 등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Clement)의 주장
‘예수님은 5월 25일 탄생하셨다.’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부(고대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데 큰 공헌을 한 성직자 또는 저술가)였던 클레멘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로마의 국민들은 누구나 마음대로 기독교를 안심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할 필요를 느꼈다. 성경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 날짜를 찾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 년도도 정확하지가 않았다.
히폴리투스(Hippolytus)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12월 25일이라고 처음 정한 인물은 3세기 초 로마의 역사가였던 히폴리투스였다.
‘예수님의 수태고지(천사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것)가 있었던 날은 3월 25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12월 25일 금요일 태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의 견해는 당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근거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동방 정교회
그런가하면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날이라고 생각하고 1월 6일을 기념하였다. 이것은 4세기 중엽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 받으신 날을 베들레헴과 요단강이라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같은 1월 6일에 기념하던 데서 시작되었다. 이날이 되면 예루살렘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서로 25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이들 두 곳을 돌아다녀야했다. 그렇지만 단 하루 동안에 이들 두 곳을 순례한다는 것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고행이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조금씩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생일이 1월 6일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맞아, 성경에도 그런 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예루살렘 교인들의 불평은 점점 더 늘어갔다. 마침내 예루살렘의 주교 키릴루스는 로마 본부의 주교 율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예수님의 실제 탄생일이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저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율리우스는 사가랴라는 사람이 초막절(가을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장막절이라고도 한다)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기초로 히폴리투스와 마찬가지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본다는 답신을 보냈다. 서기 354년경의 일이었다. 그 뒤 37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날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때부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정하게 된 것은 이것이 모든 이유일까?
당시 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농신제(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긴 신을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가 열리면 학교들은 문을 닫았다. 이때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범해도 큰 벌을 받지 않았다.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은 <토가>라고 불리는 당시 로마인의 겉옷 대신에 아주 볼품없는 옷들을 입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가장행렬이나 거리 축제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었다. 이때만은 노예든 귀족이든 신분의 차별이 없었다. 사람들은 함께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곤 했다. 이때 거리는 소란해지고 흥겨움이 넘쳤다.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는 이와 닮은 거리 축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12월 25일은 그 마지막 날에 가까웠다.
또한 그 당시 로마에는 세력이 큰 미트라교(Mithraism)라는 종교가 있었다. 본래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이원론적 종교의 근원이 된 고대 페르시아 땅의 빛의 신을 말한다. 이 이방 풍습을 유럽으로 가져온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따라나섰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12월 25일 동지제(동짓날 지내는 제사)를 지내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도 태양이 다시 새 능력으로 자신들의 농사를 도와주기를 기원하였다. 브룬말리아(Brunmalia)라는 또 다른 종교의 축제도 있었는데 이들도 12월 25일 태양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이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한 켈트 민족(오늘날의 영국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주로 살고 있는 유럽의 한 인종)의 축제와 연관이 있었다.
성서에는 예수님을 ‘의의 태양’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예수님을 같은 의미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그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로마를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으니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기독교와 자신들의 종교를 혼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축제의 날을 크리스마스로 여겼다는 설이 있다. 이렇게 예수 탄생 이전부터 12월 25일은 명절이었다. 그래서 과거부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644년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 의회를 장악했을 때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을 반대한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이 날을 장날(market day)로 지키게 했다. 심지어 미국 초기 청교도들은 이 날을 "교황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659년 미 매사추세츠 주는 공식적으로 성탄절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것은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1836년 앨라배마 주에서 성탄절은 공휴일이 되었고 남북 전쟁 이후 12월 25일은 이국에서 공식적인 성탄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과 이 땅에 오심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그럼에도 이때가 되면 엉뚱한 사람들이 흥청거린다. 예수님보다도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과 화려한 장식이 더 세상을 요란스럽게 만든다. 많은 나라에서 이때가 되면 휴가철이 된다. 그리고 세상과 거리들은 술 취함과 선물과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된다. 이방 종교의 풍습과 섞이면서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이렇게 많이 퇴색되어버렸다. 이런 것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고대 이교도들의 축제날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탄생 12월 25일에 대한 다른 반론
그런가하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 목자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12월 25일이면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가나안땅의 겨울이다. 겨울에는 양떼들이 풀을 뜯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코 양떼들을 들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9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일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날은 유대인의 큰 명절인 초막절의 시기로 이때에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작은 초막이나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광야에서의 생활을 기념한다. 그러면서 다가 올 왕국 곧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시게 될 그때를 바라보게 된다. 이때는 날씨도 아직 따뜻하고 대부분의 추수가 끝나고 사람들이 여행하기 좋은 때였다.
이것이 예수님 탄생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들르게 된 것은 호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신이 지배하던 모든 지역에 인구 조사를 명령하였다. 이 인구조사는 구레뇨라는 사람이 수리아의 총독이 되면서 당시 유대인들이 살던 이 지역에서도 실시하게 되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이 인구조사에 응하여야만 됐다. 그래서 마리아와 함께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을 하러 올라가던 길에 그곳에서 예수님을 출산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추수가 끝나고 여행하기 좋은 9월이야말로 인구조사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때였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는 이때의 초막절은 우리의 달력으로 추석과 유사한 9월 29일 정도가 된다. 초막절은 미래를 위한 절기이다. 즉 예수님의 재림(다시 오심)과 관련이 있는 절기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초막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거하게 되셨다는 말은 초막을 짓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바로 초막절에 기다리던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날은 영광의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평화와 기쁨을 동시에 우리 인류에게 선물한 날이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와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지극히 낮고 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발가벗고 내려오셨다. 교만한 사람들 앞에 하나님께서 거꾸로 겸손히 오신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란 말인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른 분이었다. 오늘날 예수를 알지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이상스레 기쁨이 넘치고 흥분되어 흥청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물론 성탄절이 세상 사람들에게 방종과 흥청거림으로 보내라고 주신 날은 더욱 아니다.
위대한 날! 영원한 날! 그날은 거룩한 밤! 거룩한 날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짜만을 섬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 날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그날의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베들레헴 별이 동방박사들에게 알려준 의미였다. 그럼 이제 우리는 그 베들레헴 별이 어떤 별이었는지를 좀 더 추적해보기로 하자.
금성(?)
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다.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여기저기 보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그럼 처음 크리스마스카드를 이웃에게 보내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최초의 크리스마스카드는 1843년 영국의 미술 선생이었던 헨리 코올이 호즐리라는 사람에게 그리게 한 것이 처음이었다고 알려진다. 헨리 코올은 훗날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었던 사람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웬지 모르게 흥겨움과 설레임으로 들뜨기 시작한다. 이런 평화와 기쁨의 분위기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늘 상 누군가로부터 기쁨과 감사의 소식을 기대하기 때문일까? 그렇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 곁에 오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장 14절)
누구든 크리스마스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신비하고도 평화스러운 별빛의 인도하심을 따라 지극히 낮은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오셨다. 기쁨과 감사를 전하는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조용히 내려오신 것이다.
크리스마드카드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그림과 축복의 글들이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히 등장하는 도안이 예수님의 탄생을 인도한 별을 그린 장면이라고 여겨진다. 낙타를 탄 동방 박사들이 먼 하늘의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사막을 여행하는 정경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 이런 카드를 보면 사람들이 늘 상 생각하는 별이 있다. 바로 계명성이라고도 불리는 샛별이다. 샛별은 새벽에 동쪽하늘에 빛나는 금성을 말한다. 이 별은 저녁이 되면 서쪽 하늘에서 신비한 흰 빛을 낸다. 사람들은 가끔 이 금성의 유난히 밝은 모습 때문에 이 별이 UFO(미확인 비행물체)가 아닌 가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 별이 저녁 무렵에 보일 때는 샛별이 아닌 태백성 또는 개밥바라기라고 달리 불려진다. 새벽이나 초저녁이나 금성의 눈부신 흰빛은 여전하다. 서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이 별의 위치는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였다는 방향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 별을 동방 박사들이 바라본 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금성이 가장 밝은 빛을 낼 때는 운이 좋다면 낮에도 푸른 하늘에서 이 별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금성은 약 2년마다 이 같은 현상을 반복한다.
고대의 박사들은 천문학의 전문가였다. 그들이 금성의 이런 현상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갑자기 나타나서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별이 금성이라고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연구
베들레헴 별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 중에는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한 케플레(1571-1630)도 있었다.
‘천문학을 공부한 내가 예수님 탄생의 비밀을 한번 연구해 보자“
케플러는 한때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탄생과 성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였다. 케플러는 1603년 목성과 토성이 가깝게 만나는 현상을 관측하게 되었다. 밤하늘에서도 유난히 빛을 내는 이 두 혹성이 가깝게 접근한다는 것은 천문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될 만큼 눈에 띠는 일이었다.
‘혹시 이런 현상이 예수님이 탄생할 무렵에도 있지 않았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천문학자 케플러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예수님 탄생 전후의 목성과 토성이 만나는 시기를 계산해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기원전 7년의 5월, 10월, 12월에 이 두 혹성이 물고기자리에서 연달아 접근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당시는 이미 유럽 지방 대부분에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목성과 토성의 만남은 무슨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기원전 7년 경 동방의 박사들이 이 신비스런 현상을 보고 유대 나라를 향하여 길을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 탄생은 실제로 기원전 3-7년 사이에 있었을 거라고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두 혹성의 접근을 계산하고 여러 문헌을 참조하여 성경의 연대를 세밀히 분석해본 케플러는 예수님께서 기원전 4년에 탄생하였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케플러의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가 쓰는 서기 1년에 태어나셨다는 증거는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고대 점성술에서 목성은 왕 중의 왕별이었다. 토성은 가나안을 지키는 방패를 상징하였다. 물고기자리는 시리아와 팔레스틴과 연관된 별자리였다. 동방의 어떤 점성술 학자가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고 유대의 왕이 유대 땅 팔레스틴에 태어났다고 짐작하였다면 앞뒤가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태양계 안에는 우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또 하나의 행성이 있다. 바로 붉은 색깔을 띠면서 빛나는 화성이다. 기원전 7년 목성과 토성이 가깝게 접근할 때 화성도 그 가까운 옆을 지났으므로 밤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이 세별이 가깝게 만나는 장면을 사람들이 예사롭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사실 별들은 맨눈으로 관찰하는 한 마치 그 늘어섬이 항상 일정하다. 그래서 별들을 항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금성이나 화성, 목성, 토성 등은 우리의 눈에는 빛나는 별처럼 보이나 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혹성들이다. 태양과 같은 항성이 아닌 것이다. 태양을 돌면서 태양에서 오는 빛을 발하는 행성인 것이다. 물론 지구도 금성과 화성 사이에 있는 혹성 즉 행성이다. 물론 지구는 1년에 한 바퀴씩 태양을 돌게 된다.
그런데 목성이나 토성은 지구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태양을 돌고 있다. 그래서 목성은 약 12년, 토성은 약 28년에 한 번씩 태양을 돌게 된다. 이것을 공전주기라고 부른다. 이런 규칙에 따라 약 20년 마다 목성은 토성을 앞지르게 된다. 이 때 두 혹성이 지구에서 볼 때 가까이에 접근하는 듯 보이게 된다. 이런 접근은 보통 1번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반년 남짓한 사이에 3번 만났다 떨어지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구에서 볼 때 토성과 목성이 모두 태양의 반대편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천구 상에서는 세 번을 만났다 떨어지는 것 같은 모습을 그리게 된다. 이렇게 3번 접근하는 현상은 약 59년에 한번 있는 아주 진귀한 현상이다. 이때는 지구와의 거리도 아주 가까워지므로 겉으로 느껴지는 혹성의 밝기도 최대가 된다. 즉 지구에서 아주 밝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사실은 밝기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항성들은 위치의 변함이 없이 늘 일정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이들 혹성들이 가깝게 접근하면 누구든 관심을 갖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점성술가나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들은 더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동방의 박사들은 좀체로 보기 어려운 이 별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움직임을 보고 유대 땅으로 달려갔던 것일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베들레헴의 별은 단수형으로 되어있다. 즉 한 개의 별이 예수님의 탄생을 안내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분이셨다. 그렇다면 두 행성이 만났다는 것은 한분 예수님을 인도한 별이 오직 한 개라는 의미와 잘 맞지 않게 된다.
핸프리즈의 새로운 이론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핸프리즈 박사는 이런 사실에 몇 가지를 조합해서 다음과 같은 조금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동방박사들은 기원전 7년 목성과 토성이 몇 달에 걸쳐 3번 연달아 만나는 것을 확인하였을 겁니다. 그리고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 목성과 토성과 화성은 천구(주: 땅에서 관측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늘을 공 모양으로 여기고 부르는 천문학의 용어)상의 좁은 곳에 모여들었지요.
그런데 기원전 5년의 봄, 염소자리에 이상한 낯선 별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별이었지요. 이 신기한 별은 중국의 옛 기록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별을 객성이라고 하였지요. 하늘에서 발생한 이런 일련의 신비스러운 현상을 동방의 박사들은 분석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떤 확신을 가진 거지요. 즉 동방 박사들은 팔레스틴을 향하여 길을 떠났을 겁니다.”
중국 사람들이 객성이라 부르는 별은 혜성(주: 태양을 촛점으로 긴꼬리를 끌고 타원이나 포물선 등을 그리며 운동하는 천체, 꼬리별이라고도 부름)이나 신성(주: 희미한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환해져서 빛나다가 다시 서서히 희미해져 버리는 별을 일컫는 말)을 부르는 말이다. 이들 역사적 근거와 천문학적 사실을 결합해서 추정한다면 그들은 수개월 후 현지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런 자료를 가지고 헨프리즈 박사는 예수님의 탄생은 5월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성경은 양치는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 사실이 유대 땅 5월의 풍경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별의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것은 아니다. <계속>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