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에서 35년간 가르치는 일만 했다. 가르치는 선생으로 있던 이 기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가시처럼 그를 찌르는 것이 있었으니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교회에 직접적인 봉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학교 강단에 섰을 때는 신학이란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고, 신학이 교회에 봉사하는 구체적 사명은 결국 '설교'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던 그였지 않은가.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정년 은퇴를 하면 목회를 하기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주위에서 만류도 있었다. 신학자로서 이름 석자 알렸으면 족하지 늦은 나이(당시 65세)에 개척교회를 한다는 게 웬말이냐고. 하지만 기질 탓인지 한번 정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게 목회를 시작한 지 5년. 주일마다 설교했던 내용의 엑기스만 뽑았다.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 동역자들에게 작은 밑거름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말씀 묵상집을 펴낸 것이다.
『삭개오의 기쁨』(한들출판사)의 저자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70)를 12일 수유리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강단에서 정년 은퇴한 이후 개척을 하여 2010년까지 5년 간 목회활동을 하며 자신이 기초를 놓은 ‘삭개오 작은교회’. 목회자들에게 교회 이름은 교회의 존립 근거이자 교회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중요한 함의를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광스럽고 복된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한데 김경재 교수, 아니 김경재 목사는 볼품없는 난쟁이 ‘삭개오’(신약성서의 등장인물)와 요즘 추세와는 상반된 ‘큰’이 아닌 ‘작은’이란, 소박하다 못해 당장 ‘자비’(mercy)를 필요로 하는 ‘삭개오 작은 교회’란 이름을 택했다.
- 왜 ‘삭개오 작은 교회’인가.
“물량적 성장주의 교회론. 나는 기본적으로 나도 목사로서 교회가 수량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은 목회자와 목회팀의 은사 내지 능력, 수고가 있다고 봐요. 절대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대형교회화 하면서 성장위주로 지난 30, 40년 동안을 온 거죠. 한국의 산업화 도시화와 맞물려 있거든요. 근대 산업사회로 진행되면서 경제와 수출 구조가 바뀌었고, 도시 간에도 '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는 신화가 머릿속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였죠.
저는 대형교회의 수고와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대형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본질을 가리고 훼손한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작은 목소리이지만, 교회가 물량적인, 건물적인, 사람의 머릿수로 진가가 결정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것이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기에 솔직히 대형교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라는 것은 ‘작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교회라고 교회가 아닌 게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교회로서 갖춰야 할 본질이 상실되면 인간이 꾸려가는 하나의 종교 사업 단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을 증언하려는 것이 동기였죠.
그 다음에 앞에다가 삭개오를 붙인 것은 내가 오늘날 세계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깊이 들여다볼 때 그리스도교회를 포함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 실존이 나는 깨끗한 밥 한 그릇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구조적으로 세계의 부정과 불의에 얽혀져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단 말이죠. 삭개오라는 인물로써 상징이 된다고 봤어요. 삭개오가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당시 힘으로 모든 것을 억압하고 재편하고 정치적으로 다스리는 제국의 식민지의 한 국민이었으나 생존 자체의 일차적 요청으로 로마의 세금징수원이 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제 체계가 물론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부정적이고 악마적인 측면에 눈감고 살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한 면에서 나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나는 수탈당하는 자이면서도 그 누군가를, 아프리카나 제 3세계의 고난과 빈곤의 동료, 인간 형제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가담하고 있는, 간접적인 의미에서 가담하고 있는 죄인임을 인정하자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종교적 예배가 19세기 유럽의 부르주아적 기독교가 범했던 자기기만의 자기만족적인 유럽적 백인 문화의 가치, 곧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라고 등식화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빌미로 하면서 식민지 쟁탈을 합리화하고, 식민지 국가에 자기들의 가치관을 폭력적으로 강압했던 것을 반복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현대 21세기 한국교회가 실질적으로 삭개오와 같은 존재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삭개오가 현실적으로는 로마제국 구조 속에서 밥 먹으며 세리 짓을 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 아님을 깨닫고, 본래적인 삶을 찾아서, 예수를 찾아서 목말라 했듯이 우리는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새로운 존재를 지향하는 교회로서의 비전이니까. 삭개오 작은 교회라는 세 마디 단어 속에 이런 설립정신이 있지요.”
‘삭개오 작은 교회’의 특색을 말해주는 예전의 단순성에 관한 설명도 있었다.
“교회 규모가 작으니까 예배만큼은 될 수 있는 대로 단순성을 핵심으로 해서 인위적인 냄새를 다 제거하고, 순수한 예배는 예배답게 하기로 하고. 예배 드린다고 해서 인간들이 앞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영광받고… 그런 자기기만, 종교를 통한 자기기만처럼 무서운 기만이 없어요. 거룩을 포장지로 해서 인간이 자기 죄성을 은폐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참여하는 신도들이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시달리는 지극히 작은 낱개들이라서... 청년들은 실직에 비정규직에 시달리고, 직장에서는 서로 경쟁관계 속에 있으니까. 그래도 고맙습니다. 심방을 하는 것도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다들 먼 곳에서 비가 오나 눈이 와도 참석을 하니 말이에요. 하지만 (낱개로 있는) 인간들이 약해서인지 제가 봤을 때 삭개오의 설립정신은 한 20%나 구현되었다고 할까요. 처음부터 쉽게 금방 될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볼 때 교회가 자기 성격(색깔)을 드러내려면 30년은 최소한 성장해야 한다고 봐요. 30년이 지나면 달라지겠죠.”
- 천박한 자본주의, 물량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잃었다는 평이 각계 각층에서 들려온다. 그 본질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 정황에 걸맞는 교회론과 기독론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했는데 같은 얘기에요. 기존의 것을 포기하고 고쳐야 하고, 기존의 이념사상 체계,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꿔야 하는 것은 상당한 불안정을 야기시키니까. 보수가 그래서 생기잖아. 우리는 그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고 이전 것을 지키겠다, 그것이 보수의 논리다. 보수 신앙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인간과 생명과 우주를 이끌려고 하시는 그런 아브라함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비전에 대한 용기를 포기하려고만 한다. 이렇게 교회가 굳어지고, 더욱이 이미 기존 틀이 가지고 있는 권력 맛 이나 물질 맛을 본 경우 더욱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거죠.
신약 예수 시대에도 기득권을 가진 이들로부터 복음이 시작된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불안하고 불안정할 수 있으나 새로운 것이 도래해도 별로 손해볼 게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 공동체 운동이 시작됐지. 기득권은 그것에 거절을 합니다. 지금 기득권이라는 게 나 같은 신학자, 잘나가는 목사나 대형교회 교인들일 수 있고,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란 조직일 수 있죠. 한기총 해체가 왜 어려운 줄 압니까? 이미 구성된 조직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그것을(해체를) 원치 않거든요, 좀 고쳐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만 생각하는게 문제죠.
폴 틸리히 식으로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질서가 필요해요. 존재를 설명하는 세 가지가 있죠. 먼저, 개인 개체화와 사회화 그리고 참여. 개인이 정말 성숙한 개인이 되려면 단독자로서 떨어져서가 아니라 사회관계의 구조 속에 책임적으로 참여해야 하죠. 그러면서 개인의 인격이 성숙되는 것이죠. 사회는 사회고 나는 나다라는 게 아니죠. 진짜 실존주의자들은 굉장히 사회참여적입니다. 실존철학자 사르트르가 대표적이죠. 프랑스의 사회 문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어요. 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개인과 사회와의) 분리를 외치죠.
두 번째 원리로 폼(form)과 다이내믹스(dynamics). 모든 것은 길항작용(拮抗作用) 속에 있어 둘 다 필요로 합니다. 폼이 없으면 존재가 물처럼 해체되어 버려서 있을 수가 없게 되죠. 원자가 최소한 원소 형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듯 말이에요. 그 폼이 사회로 말하면 제도, 법률, 총회 여러가지로 나타나겠죠. 신학 교의도 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굳어져버리면 죽은 게 되는 것이죠. 새로운 것이 발생할 수가 없게 됩니다. 폼의 형태내지 형식의 두꺼운 각질을 변혁시켜서 새로운 새순이나 새살이 돋아날 수 없도록 자꾸 겉에다가 페인트 칠을 하고 새롭게 된 것처럼 위장시키는 것만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사람이란 생명은 참 묘합니다. 생명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죽은 세포는 없어지고 새로운 세포가 계속해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론이나 성령론을 보면 정통적 기독론은 상당히 불변적 질서와 폼에다가 엑센트를 준 거죠. 그것이 많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되니까 성령론적 기독론이라고 하는 것도 나오게 됩니다. 소위 그리스도교의 고전적 기독론이 완성되었다는 4세기 니케아공의회 등에서 완결되었다고 자부한 기독론은 당시 그리스의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리스도론을 형성했던 하나의 포맷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적이며 요지부동이라고 하면 이게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철학적 본질과 체계 속에 갇혀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저항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20세기로 말하자면 역사적 예수 연구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이죠.
그러나 반면에 기존 포맷을 해체하려는 해체주의적 시도가 극단으로 나가면 상대주의, 허무주의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이것도 저것도 없는 기준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잖아요. 생명의 원리가 그렇듯이 어떻게 하면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그 형태가 생명의 역동성을 방해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의 새로운 것의 발현을 돕는 형태의 조직기구가 되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그것이 미달해서 늘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왜 미달하는가? 그게 인간의 죄성 때문이 아니겠어요?"
한국교회가 각종 교리나 예전을 복잡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한국교회의 전통과 흐름이 교회의 제도화를 부추겨 생명력 넘치고, 역동적인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었다.
“각질, 껍질을 부드럽게 하라는 것은 노자의 도덕경, 불교, 유교가 줄기차게 강조해 왔던 것이죠. 부드럽고 가볍게 하라. 부드러운 것이 강직함을 이기는 것이다. 그 다음에 되도록 단순하게 하라. 복잡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죠. 법률은 오래가면 갈수록 자꾸만 법을 만드는 속성이 있어요. 율법주의의 폐해가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죠. 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인데 말이죠. 어느새 우리 사회를 비롯한 교회는 법률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러면서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관적으로만 판단하기를 거부한 그는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깨어있는 창조적 소수를 통해 역사는 새순으로 뻗어나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며 이어 『삭개오의 기쁨』에 자신이 평소 갖고 있던 교회론, 기독론의 정초가 담겨있다며 타 설교집과는 구별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했다.
“삭개오의 기쁨. 짧은 네 개의 문단 형식으로 표현된 설교 형태의 선포적 형태이지만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교회론이나 그리스도론, 하나님의 선교론, 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하는 하나의 의식의 패러다임의 전환에 촉발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바람입니다. 경동교회에서 설교집을 한번 낸 적이 있는데 후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그 때 살아있는 즉석음식이어야 하거든요. 이것은 설교집이 아니고, 그것의 엑기스를 요약함으로써 설교를 구상하는 사람들에게 아 이렇게 이 포인트를 가지고 우리 교회에선 이런 쪽을 강조해서 설교를 구성하면 되겠다라는 등의 힌트를 주는 것이고. 평신도들에게는 평소에 긴가민가 고민한 화두와 주제들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용기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결국 신학은 단순한 형이상학의 철학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칼 바르트의 입장인데,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문득, 책 제목에 시선이 갔다. 삭개오의 기쁨.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생존을 위한 일차적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동족의 혈세를 뜯어 연명하는 세리로서의 삶을 자의 반 타의 반 살아갔던 삭개오에게 참 기쁨이란 실종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삭개오가 기쁨을 찾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예수를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키가 작은 그는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조차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실존에 절망하고, 새로운 존재에로의 소망으로 예수를 보고자, 만나고자 했던 삭개오가 용기를 내어 선택한 방법은 ‘뽕나무’에 오르는 일이었다. (누가복음19: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