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보 목사
김희보 목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고난을 당하여”는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이다. 이것은 종이 고난을 자원하여 받은 것을 가리킨다.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참아냈다는 것을 가리킨다. 종은 고난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셨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의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베스트 셀러를 가리켜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우리나라 신문학사(新文學史)에서 최초로 베스트 셀러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서운(曙雲) 박계주(朴啓周, 1913-66)의 <순애보(殉愛譜)>(1939)이다.

평자들은 통속소설이라 하며 <순애보>를 평가 절하하여왔으나, 이는 편견에 따른 잘못된 것이다. 서구(西歐)에서 자연주의소설과 재단비평(裁斷批評)이 주름잡던 때에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삼류소설이라고 평가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꿉친구였던 최문선과 윤명희가 다시 만난 것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순결한 애정이 싹텄다. 한편 물에 빠졌다가 문선에게 구출된 인순은 열정적으로 문선을 사모하였다.

인순의 간청으로 문선은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괴한의 습격으로 인순은 살해되고 문선은 맹인이 되었다. 문선은 치정(癡情) 살인의 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범인이 문선을 찾아와 자기의 범행을 자복하였으나 문선은 침묵하였다.

각 신문에서는 “좀먹는 십자가ㅡ신성하다는 기독교의 교육자로서 강간미수, 살인만행”이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내고 문선을 공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문선은 범인 이치한을 용서하고 자기 사형의 날을 기다렸다.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하는 찬송을 부르며 사형을 기다리는 문선. 그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자기를 이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스러운 사도(使徒)의 반열에 올라 있었고 말할 수 있다.

이치한의 자백으로 최문선의 무죄가 밝혀지자 신문들은 언제 문선을 비난하였느냐는 듯이, “보라, 여기 십자가의 사도가 있다” “사랑은 죽지 않는다. 어제의 악마, 오늘의 천사로” 등의 찬사로 도배하였다.

감옥에서 풀려 나온 문선은 앞을 못 보는 자기가 명희의 행복을 파괴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마음으로 명희의 행복을 빌면서, 함흥 근방 한 시골로 떠났다. 그러나 명희는 사방팔방으로 문선을 찾은 결과 문선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사랑은 물질이 아니라 행복의 본질이다. 명희는 앞으로 문선의 발이 되고 눈이 되어, 문선이 작품 쓰는 일에 도움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사랑에 순(殉)하는 순애(殉愛)의 사도들이요 십자가의 제자들인” 문선과 명희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순애보>를 추천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랑은 주는 것이요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한량없이 주고 주어 마침내 제 목숨까지 주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크리스천인 작자는 그리스도의 ‘주라!’ 하신 사랑의 원리의 신봉자(信奉者)이다.”

김희보 목사는

예장 통합총회 용천노회 은퇴 목사로, 중앙대 국문과와 장신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서울장신대 명예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문학과 기독교(현대사상사)」,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3권)」, 「지(知)의 세계사(리좀사)」, 「세계사 다이제스트1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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