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생명의 진액(津液)을 다 바치는 예수
감람산에는 감람나무(올리버, Olive)가 많아서 감람산이라 불린다. 여기서 주민들은 감람나무 열매를 압착하여 올리브 기름을 짜낸다. 그처럼 예수는 자신의 진액을 다 바쳐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리신다. 간절한 기도는 땀이 마치 핏방울 같이 되었다. 누가는 예수의 기도를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그는 인간적으로 이 무거운 짐을 벗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이 때 천사가 예수의 기도를 도와준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 22:43). 이 때 예수의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였고, 그의 땀은 핏방울이 되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누가의 기록은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 면모와 자기희생적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프랑스의 기독교 영성 사상가 파스칼(Blaise Psacal, 1623-1662)은 명상록에서 예수가 그에게 말씀하시는 영적 체험을 다음 같이 고백하였다: “저 핏방울들을 나는 너를 위해 쏟았다.” 파스칼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흘리신 핏방울이 바로 그 자신을 위해 흘리신 것이라는 영적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예수의 흘리신 피가 단지 인류를 위해 흘리신 객관적 피흘림이란 추상적인 교리적 지식이지만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객관적 구속의 사건이 내면화되는 순간이다. 파스탈의 명제는 예수가 흘리신 피가 그의 죄를 사하는 인격적인 체험을 표현한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에 가장 예민한 지성을 가진 사상가로서 성령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를 인격적으로 체험한 귀중한 그리스도인이다.
III. 참된 기도의 전형(典型):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는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예수는 두 번째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드리신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예수는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기도 중의 모범적인 기도이며, 기독교 기도의 핵심이다. 독일 마르부르그의 신약학자요 실존주의 신학자 불트만은 피력한다: “예수는... 단순히 인간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그 분 안예서 견본처럼 드러나는 전형일뿐 아니라.. 그분은 무엇보다도 계시자이다. 그분의 결단이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결단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트만은 예수의 기도를 전형으로서 인간의 실존적 결단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의하면 기도는 단지 인간의 결단에 끝나지 않는다. 기도란 인간의 정성(精誠)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예수는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십자가의 잔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가 반드시 마시고 받아야만 하는 세례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자기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도록 결단하였다. 이것이 기도 응답이다. 이것이 승리의 기도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행하신 예수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드려야할 기도의 전형(典型)을 보여 주신다. 물론 예수는 주기도문도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이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 주셨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문은 기도의 정신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번영의 신학이나 무속종교의 기도와는 전혀 다르다.
번영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께 복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투자하고 정성을 드려라고 요구한다. 무속종교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무속신(巫俗神)들에게 정성을 드려야 하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제사물의 양과 질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무당굿은 하면 할수록 그 규모가 커지고 드리는 자들은 패가망신한다. 번영의 종교가 된 변질된 기독교의 부흥사들도 복을 받기 위하여 신에게 예물을 드려야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치유 은사자들은 치유받기 위하여 엄청난 헌금을 요구한다. 이는 바른 기도가 아니다. 이는 상업화된 종교의 기도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사를 종교적 상품으로 바꾸는 가증한 일이다.
참 종교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져 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마음을 비우고 그분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야말로 참 종교의 기도인 것이다.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이러한 기도의 전형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친히 그길을 가셨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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