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일보는 내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해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글을 연재합니다.
1. 로버트 토마스, 우리에게 직접 말을 해오다
세상에는 증인이 있고 변호사가 있다. 이 두 가지 중 증인이 더 강력하게 힘을 발휘한다. 일차적이기 때문이다. 변호는 이차적이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 9. 6-1866. 9. 5)가 우리에게 알려진 경로도 그러하다. 대개는 토마스에 대한 변호들에 그쳤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 대한 말들을 통해, 그러니까 한 번 걸러서, 우리는 토마스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가 우리에게 직접 말을 하게 된 때가 온 것이다. 이 일은 2017년 12월, 한 해가 기울어가는 세모(歲暮)에 출판된 한 권의 책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학 연구의 대석학 민경배(閔庚培) 교수가 엮어 펴낸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인데 부제가 중요하다. 그 부제는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이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
민경배 교수의 노작으로 우리는 직접 토마스가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에서, 그를 두고 주고받은 편지들, 회의록들, 보고서들에서 우리는 토마스가 하는 말을 육성으로 듣게 되고, 토마스가 했던 일을 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변호인의 어떠한 간섭도 없이, 생략이나 추상도 없이, 현장 그대로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원초적인 자료들을 우리는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그날의 역사와 선교의 경로, 그리고 동서 교섭의 문제들을 함께 살펴볼 생각이다. 이것은 문헌학적 역사 연구의 방법이고, 따라서 현재의 어떤 가치에 의해서 그때를 판단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제거한다. 1850년대 60년대의 역사가 스스로 무대와 대사를 전개하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귀한 사료를 어렵게 모으고 그것을 번역하고 엮고 펴내어 온 세계가 공람할 수 있도록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민경배 교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하는 바이다. 개인적인 말을 해서 안 되었지만 이 분은 필자의 존경하는 스승이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가의 긍지와 보람과 공헌이 그런 곳에도 또한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감명 깊게 깨닫게 되었다.
2. 한국교회에 로버트 토마스의 생생한 실체를 마주하게 해준 민경배 교수의 노력
민경배 교수의 노력으로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된 이 편지들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그가 직접 발굴해낸 것들이다.
解放 이후 吳氏의 主導下에 토마스목사 기념전도회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 토마스목사의 母校이던 런던대학교의 New College에 遊學한 閔庚培교수가 토마스의 고향과 그 학교와 선교회 본부에서 토마스목사의 背景과 傳道活動의 기록을 많이 발굴하여 그의 近著 “韓國基督敎會史”에 收錄하였다.
당시 민경배 교수는, 영국에서 돌아와 얼마 뒤, 이 생생한 자료들을 가지고 논문을 썼다. “로버트 토마스: 한국 초기 선교사의 한 유형과 동서 교섭의 문제”라는 논제였다.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문제의 소재와 연구 재료 및 방법
2.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의 성장배경
1)그의 성장
2)그의 교육의 곡절과 과정
3)목사 안수와 선교사로서의 출발
3. 한국에 대한 선교 전망의 촉진력
1)중국에서의 계속적 불운
2)세속직과 선교사 의식
3)조선에의 제1차적 접촉
4. 토마스의 조선 선교와 그 순교
1)조선에 대한 토마스의 선교 의욕 구형(構形)과 여러 문제
2)제너럴 셔먼호의 출범
3)토마스의 순교노정
5. 토마스의 선교가 남긴 여러 문제
1)런던선교회(L. M. S.)의 토마스 비판
2)동서 교섭의 한 원형
6. 결언
한편 민경배 교수는 이 논문에서, 그동안 한국에서 잘못 알려져 있던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와 관계된 몇 가지 사실들을 우선 바로 잡았다. 토마스에 얽힌 오해 두 가지는 첫째, 그의 출신지와 둘째, 그의 출신대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스코틀랜드인으로 알고 있었다. 토마스는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파견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왔던 것이다. 한국 초대 목사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으며, 토마스 선교사 다음으로 한국선교의 개척자로 평가되고 있는 중국 봉천의 로스와 맥킨타이어 목사도 스코틀랜드 사람들이었다.
또한 1932년 토마스 목사 기념교회당이 그가 순교한 평양에 세워졌을 때,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이사들이 그 기념비를 세우고 있었다. 그보다 앞서 1926년 백낙준 박사도 그의 예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개신교사」에서 토마스를 스코틀랜드인이며 그곳 에든버러 대학교의 뉴 칼리지 출신으로 적고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웨일즈 인이요 런던대학교 뉴칼레지 출신임이 민경배 교수의 이 논문을 통해 밝혀졌던 것이다. 1970년 런던대학교 뉴칼레지에서 유학하던 민경배 교수는 그곳 나탈(Geoffrey F. Nuttal) 교수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토마스’, 대개는 ‘이름’으로 쓰이는 것을 ‘성’으로 쓰는 사람들은 웨일즈 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뉴칼레지는 영국에서 에든버러, 옥스퍼드, 런던 세 곳에 있는데, 토마스가 웨일즈 인이라면 멀리 에든버러까지 가서 공부했을 리 없다는 판단이 섰다. 웨일즈 인명 명부에서 로버트 토마스 항목의 긴 설명을 발견한 그는 나탈 교수의 도움으로 곧바로 런던대학교 기록물 보관소를 뒤졌고 1850년대와 1860년대 교수 회의록과 이사 회의록에서 토마스의 이름을 도처 발견했다. 복사가 허락되지 않아 일일이 다 카드에 옮겨 적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간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에는 런던선교회 기록물 보관소인 리빙스턴 라이브러리에서 뜻밖의 배려로 토마스가 주고받은 서신들 일체를 복사할 수 있었다. 그 감격이 어떠했으랴.
뿐만 아니라, 얼마 뒤 민경배 교수는 몇 명의 한국인 동료 교수들과 함께 토마스의 고향 라야다와 토마스가 자라난 곳이자 그의 부친이 목회하던 웨일즈 몬마우스 주 아버가버니에 있는 하노버교회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의 생생한 실체를 눈에 담고 손으로 만지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 교회 바람벽에 토마스 순교 기념비문이 걸려 있었는데, 거기 욥기의 말씀이 쓰여 있었다.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그리고 이왕 발굴한 그의 숨결과 손길이 생생한 편지들까지 실물로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최근에 토마스가 직접 주고받은 편지들과 나아가 이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와 관련된 모든 문서 자료들이 민경배 교수의 번역과 편술로 모두에게 공람됨에 따라 한국교회가 직접 이 교회의 씨앗이 된 로버트 토마스의 순교의 피와 그 선교 여정 전체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벅차오르는 가슴을 누를 길 없다. 감개무량하다. 한편 민경배 교수가 이 책을 역술하면서 붙인 머리말의 제목과 항목은 다음과 같다.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그 실체를 찾다
순교자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인간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
그의 한국행은 하나님의 섭리
3. 도표로 보는 토마스의 선교 여정 스케치
– 중국 파송 선교사의 한국행과 그 순교 경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의 생생한 실체를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과 그에 관한 기록들을 통해서 살펴볼 때, 선교사 토마스의 생애를 구분 짓는 몇몇 마디가 있다. 그런데 민경배 교수가 토마스의 편지들과 관련 기록들을 편역, 서술하면서 밝혀놓은 마디가 참으로 적당하다고 하겠다.
제Ⅰ부 대학 시절(1856-1864)
제Ⅱ부 런던선교회 파송 중국선교사 시절(1864-1865)
제Ⅲ부 중국에서의 독자 선교 시절(1865)
제Ⅳ부 한국 선교 시절(1865-1866)
제Ⅴ부 토마스 순교 이후(1866-1899)
제Ⅵ부 기타 자료들
한편 필자는 민 교수의 이 책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를 가지고 필자가 속해있던 신학교에서 한 학기를 강의했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宣敎史)’라는 과목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 책을 읽어가며 세미나를 한 것이다. 그 속에서 함께 듣고 보고 나눈 한국 최초 개신교 순교자의 육성과 사진, 그 감동은 특별했다.
그 강의를 진행하면서 수업 시간과 앞서거니 뒤서기니 하면서 로버트 토마스 자신의 생생한 증언을 필자는 글로 남겨 교계 주간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 제목만을 여기 소개한다. 제목을 따라 순서대로 읽다보면, 로버트 토마스의 신학 수학과 선교사 파송, 그리고 어떻게 중국으로 파송된 그가 한국을 그렇게 다녀가고 끝내 순교까지 하게 되었나를 거칠게나마 스케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표. 토마스 선교사에 관한 류금주의 글: 한국교회 비사 117-154, 한국장로신문(2018. 9. 29-2019. 7. 20)
이 글들을 대략 나누면, 여기서 117-119번은 서론 격이다. 그리고 153번은 결론, 154번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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