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렴 선교사가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백만인구령운동'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흥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을 방문해 군산, 전주, 광주, 목포, 공주, 행주,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한 조지 데이비스George T. B. Davis 목사는 '백만인구령운동'의 현장을 3개월간 목도하고, 그때의 놀라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백만인구령운동'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넘치고 있었으며, 선교사들은 이 운동을 위해 기도하고, 지역을 순회하며 인도하고 있었고, 반면 한국인들은 여러 날을 연보로 드렸으며 열심을 다해 이웃을 전도하기 위해 복음서를 구입했다. '올해에 백만 명'이라는 외침은 들불처럼 조선 전역을 휩쓸었으며, 조선인은 영혼 구령을 위해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백만인 구령운동의 불길이 목포지방에도 어김없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조지 데이비스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하위렴 선교사가 통역을 맡았는데 뜨거운 성령의 임재가 집회 내내 계속되었고, 눈물로 심령을 찢는 통회 자복의 역사가 교회와 지역을 휩쓸었다. 부흥회 기간, 전 교인이 성경 반포에 앞장을 서겠다며 마가복음을 5천 권이나 구입해 전국 어느 도시, 어느 교회에서도 보지 못했던 기록을 세워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목포에서는 하위렴 목사가 몸이 불편한데도 통역을 맡았으며 325명의 교인이 마가복음을 5,000권을 주문하기도 해 기록을 깨기도 했다."
구령운동의 열풍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하면서 증축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예배당이었으나 모여드는 교인을 도저히 다 수용할 수가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남녀를 따로 나누어 남자는 본당에서 모이고, 여자는 그 옆에 있는 서양식으로 지은 영흥학교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다. 무려 350여 명 정도가 모이는 주일학교 역시 13개 반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한편 전 교인을 10개 조로 편성해 조별로 집회 당시 구입했던 마가복음을 집집마다 배포하는 축호逐戶 전도에 참여했는데, 맹현리 선교사는 이때의 상황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교회 모습에 견주기도 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행 5:42)
조지 브라운 목사 역시 그의 책에서 부흥회 기간에 뜨거웠던 전도의 열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짧은 집회 기간에 목포 일대에 있던 집이라면 복음을 전하지 않고 지나친 곳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 한 해 동안 36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학습 또한 거의 같은 수의 교인이 받았다. 그뿐 아니라 주일학교가 이웃 마을의 지교회까지 확대되면서 교사들이 주일마다 방문해 지도하기도 했다.
양동교회의 재건축과 리더십의 이양
백만인 구령 운동의 여파 속에 하위렴 선교사와 윤식명 목사와의 협력 목회는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내며 뜨거운 교회 부흥을 불러일으켰다. 매 주일 교인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남녀가 따로 나뉘어 예배를 드려도 앉을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예배당이 비좁아지자 교인들의 관심이 자연스레 교회 재건축으로 모이면서 전 교인의 기도 제목이 되고 있었다.
그 당시 교회 재정이나 교인들의 형편을 비춰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으나, 교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교회 건축에 협력하겠다는 각오로 한마음이 되어있었다. 교회 건축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가운데, 증축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교회당을 헐고 다시 건축하기로 공동의회에서 의결하자 선교부에서도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다.
"더 큰 예배당의 필요가 교인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많은 기도와 회의 후에 교인들은 62x36 ft²새로운 석조건물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커다란 부담이 떠맡겨졌으나 그들은 선교부에서 지원한 $500로 마련한 대지와 기존의 대지를 합해, 그 위에 지금의 건물을 시작해야만 했다. 게다가 선교부에서는 교인들이 $900의 건축헌금을 마련하면 그 절반인 $450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략) 부녀자들 가운데는 은반지나 비녀를 바치기도 하고, 어떤 남자 교인은 건축에 필요하다면 자신의 집을 팔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건축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가 부지에 준비되고 있었다."
설계도를 그리고 자재 구입과 함께 인허가에 필요한 법적 준비까지도 다 마치고 실제 건축을 시작하려 할 즈음, 두 사람의 시무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순천으로 이사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 교회 건축이라는 과업을 놓고 책임을 맡았던 장로가 이사한다는 소식을 접한 하위렴은 한동안 당혹스러웠으나 개인 사정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 사람의 장로라도 남아있음에 애써 위로를 삼아야만 했다.
교회 건축이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교인들을 이끌어 갈 장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하위렴은 두 사람을 피택하고, 동분서주하며 대리회의 허락을 받아냈다.
"유 장로가 새로운 스테이션이 있는 순천으로 이사했는데 교회로 봐서는 일꾼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장로 한 명이 아직 남아있고, 빈자리에 채우기 위해 대리회의 허락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에서 두 사람의 집사를 선출해 두었다. 그들이 과정을 거쳐 시험을 통과하면 장립이 될 것이다."
온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선교부의 지원에 힘입어 이듬해인 1911년 864평 대지에 121평의 석조건물을 완공했다. 교인들이 직접 날라온 유달산의 화강암으로 축조한 양동교회는 그 당시에는 보기조차 힘든 최초의 서양식 건축양식으로, 한때 이 지역의 명소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도 하위렴의 업적으로 남겨질 양동교회 건축에 그의 은사와 리더십이 크게 발휘되었다는 것은 거듭 말할 필요가 없다.
양동교회는 전 교인이 함께 협력해 세운 이 지역 최초의 자립교회란 점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교회당 건축 과정을 통해 하위렴은 자연스럽게 한국인 목사(윤식명)에게로 리더십을 이양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 후 양동교회는 이경필 목사(8대)가 담임하던 시절(1919), 4.8 목포 만세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으며 그 뒤를 이은 박연세 목사(10대)의 부임으로 신사참배 반대와 항일 민족운동의 본산지가 되기도 했다.
양동교회에서 시무했던 이남규 목사(12대)는 해방이 되고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전남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양동교회는 구정교회, 온금동교회, 중앙교회, 죽교리교회, 연동교회, 서부교회 등을 분립하면서 이 지역교회의 산파역을 감당했으나 해방 후 노회가 분열되면서 안타깝게도 양동교회는 기장으로, 이름을 달리하며 갈려 나간 양동제일교회는 예장으로 나뉘고 말았다.
스테이션 조성공사(1910-1912)
그뿐만 아니라 하위렴 선교사는 부임과 동시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선교사 숙소를 포함해 3채의 주택 공사에다 목포병원과 정명여학교 건축까지 완공시킴으로써 14,000평에 달하는 목포 스테이션의 조성공사를 실질적으로 마무리했다.
오웬 선교사가 과로로 쓰러지고 나서 그 후임으로 부임한 리딩햄Roy S. Leadingham/한삼열이 1912년부터 의료사역을 이끌었으나, 안타깝게도 1914년 한 직원의 실화失火로 하위렴 선교사가 건축했던 병원 건물 전체가 전소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마침 하위렴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목포를 떠나 미국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하위렴 선교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군산지부로 복귀한 후에 일이지만,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통해 목포병원의 화재 소식을 전해 들은 미주리주의 성 요셉 장로교회의 성도들이 앞장서 헌금을 하고, 거기에 독지가인 프렌치Charles W. French씨가 기부한 금액을 보태 1916년에 불탄 그 자리에 석조건물로 다시 병원을 짓고, 기증자를 기념해 프렌치 메모리얼 병원으로 불렀다. 리딩햄은 목포에서 11년간 사역을 하다 1923년 귀국하였다.
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프렌치 메모리얼 병원은 이 지역에서 의료선교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왔으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강압으로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결국 문을 닫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후로 다시 문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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