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콜슨 센터의 선임 작가이자 업스트림 팟캐스트(Upstream podcast)의 진행자인 셰인 모리스 작가의 기고글인 ‘더 이상 친구가 없는 이유’(Why nobody has friends anymore)를 24일(현지시간) 게재했다.

콜슨 센터는 기독교인들이 현대 사회에서 신앙을 기반으로 명확하고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이를 위해 다양한 교육 자료와 리소스를 제공하여 기독교적 가치관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단체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코미디언 존 멀레이니는 예수님의 가장 큰 기적 중 하나가 30대에 가까운 친구 12명을 가졌던 것이라고 농담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정의 감소는 농담과는 거리가 멀고, 실제로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 생활조사센터(Survey Center on American Life)에 따르면, 1990년에는 거의 70%의 남성들이 다섯 명 이상의 가까운 친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2021년에는 이러한 친구를 가진 남성의 비율이 40%로 줄어들었고 가까운 친구가 전혀 없다는 응답은 다섯 배나 증가했다. 여성들 또한 상황이 좋지 않지만 그들의 친구 그룹은 남성들만큼 급격히 줄어들지는 않았다.

우정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우정은 자연스레 사라지거나 멀어지기 마련이다. 오늘날, 더 바쁜 삶의 속도와 일정이 가득 찬 이유로 인해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과 의도가 필요해졌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이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10년 전보다 절반이나 줄어든 주당 3시간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치, 외교, 비즈니스 등의 주제를 다루는 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애틀랜틱》의 올가 카잔은 이를 "우정의 역설"이라 불렀다.

평범한 미국인은 종종 여러 사람에게 "우리 꼭 만나야 해!"라고 문자를 보내지만, 결국 혼자 소파에 앉아 틱톡을 보다가 잠드는 것처럼 보인다. 즉, 친구는 있지만 실제로 만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친구가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쯤에서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다시 연결하라고 충고할 수도 있겠지만 카잔은 이러한 고립의 원인이 단순히 게으르거나 화면에 중독된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대신, 친구들을 만나거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정기적인 기회가 매우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카잔은 로버트 퍼트남의 24년 된 저서 ‘Bowling Alone’의 주제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서로 덜 보게 된 주요 이유로 "노동조합, 시민 단체, 종교 단체"의 붕괴를 꼽았다. 이러한 이른바 '제3의 공간'은 자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주기적으로 같은 시간과 장소에 모이는 것이 우정 형성과 유지를 훨씬 더 쉽게 만든다.

따라서 우정을 회복하는 해결책은 "이를 위한 앱이 있다"는 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카잔은 사람들이 우정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디지털 기술이 소개팅 앱만큼이나 실망스러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기술은 각 개인이 연락을 주고받고 일정을 조율하며 모두의 식이 제한을 맞출 장소를 찾는 등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에 몇 백 명의 친구들과 같은 건물에 모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선, 우정은 사치품이나 매주 외식하는 것처럼 단순히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우정을 “가장 영적인 사랑”이라 불렀으며 이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 생물학적 법칙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신,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친구를 만든다.

우정은 철학, 예술, 우주 자체와 같아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생존에 가치를 부여하는 요소다.

우리의 외로움으로 인해 초래한 피해, 자살 증가 등을 보면, 우정이 생존 가치가 없다는 루이스의 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 우정은 사람을 절망의 끝에서 돌아오게 하는 요소일 때가 많으며 이로 인해 우정의 쇠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카잔과 퍼트남의 통찰은 우리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친구를 사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우정이 형성되고 번영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는 예전에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단절된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결혼할 상대를 만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교회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일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청소년 그룹, 기독교 학교, 협동조합, 성경 공부 모임, 기독교 대학은 평생 친구를 만드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또한 제3의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가정을 개방할 수 있다. 이때 단순히 교회의 사람들뿐 아니라, 통계적으로 사회에서 가장 외로운 구성원인 종교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정기적이고 부담 없는 교류는 믿지 않는 이웃들이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했던 관계를 제공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기뻐하고 망가진 것을 회복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정은 그러한 선물 중 하나이며 그 쇠퇴는 사람들을 상처 입게 했다. 분열되고 산만해진 시대는 우리 모두를 고립과 자기 몰입으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몇몇 가까운 친구를 가지는 것을 기적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