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마아스슬라위스(Maassluis)에서 얀 프레데릭 까위뻐르(Jan Frederik Kuyper) 목사와 그의 아내 헨리에뜨 휘버(Henriëtte Huber) 사이의 셋째 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855년 7월 16일, 17살의 나이로 레이든대학교(Leiden Universiteit)에 입학하여 1858년 4월 29일에는 고전문학 시험에서 최우등성적(summa cum laude)을 받았고 1862년에는 그곳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목사, 편집장, 교수, 하원의원, 수상 등 다양하고 화려한 이력의 삶을 살다가 1920년 11월 8일에 지상의 생을 마감했다.
본 논고에서는 목사와 신학자 및 신학교수로서 카이퍼의 신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그의 정치사상, 특히 그가 어떻게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초기의 정치적 입장과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의 초기 정치관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저술 『우리의 강령』(Ons Program)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 책의 1879년 초판은 모두 2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307쪽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출간된 반
면에, 1년 뒤 1880년에 출간된 재판은 초판과 동일하게 22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으나 내용이
493쪽으로 대폭 줄었다.
먼저 카이퍼가 정치에 입문하도록 그를 직접 끌어들인 인물로 보이는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Groen van Prinsterer)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와 카이퍼의 초기 관계에 대해 살펴본 다음, 당시 네덜란드 왕국의 정치적 상황은 무엇인지, 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에서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반혁명적, 즉 기독교 역사적”(Antirevolutionair, Christelijk-historisch)이라는 정치 입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봄으로써 초기 정치사상의 핵심 내용을 밝히는 것이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이다.
Ⅱ. 카이퍼와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의 이름은 불어로 기욤(Guillaume)인데 네덜란드어로는 빌름(Willem)에 해당한다. 그는 1801년 8월 21일 포오르뷔르흐(Voorburg)에서 태어나 1876년 스-스라아픈하아허(’s-Gravenhage)에서 사망한 네덜란드 법률가이자 정치인이다. 그의 아버지 베드로 야곱(Petrus Jacobus)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는 의사(Doctor)였고 어머니는 아드리아나 헨드리카 카안(Adriana Hendrika Caan)이다. 흐룬은 1817년 5월 9일, 16살의 나이로 레이든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1823년에는 각기 다른 지도교수에게서 법학박사 학위와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법학 전공자였지만 정작 역사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823년에 대법원 변호사가 된 후 네덜란드 국왕 빌름 1세(Willem I) 내각의 일원으로 먼저 자문관(referendaris), 그 다음에는 비서실장(secritais), 그 다음에는 왕실문서고(Koninklijk Huisarchief) 책임자였으며 1840년에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DubbeleKamer)의 회원이 되었고 1849-1857년, 1862-1865년에는 하원의원(lid van de TweedeKamer)이었다. 국가교회인 개혁교회의 일원으로 반혁명당 수장이었다. 그의 유명한 정치관련 저술 두 권을 꼽으라면 하나는 1847년에 출간된 『불신앙과 혁명: 역사 강의 시리즈』이고 다른 하나는 1860년에 출간된 『네덜란드 개혁교회 내의 반혁명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정당』이다.
1871년에 흐룬은 반혁명당 의원들과도 결별하고 보수당과도 연대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의회 의원선거 후보자로 3명 즉 법학자 꾀허니우스(L. W. C. Keuchenius)와 목사 카이퍼와 교장 판 옷떠를로오(M. A. van Otterloo)를 추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이때까지 반혁명당은 자체의 일간지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카이퍼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주간지 ‘드 헤라우트’(De Heraut) 협회가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함으로써 1872년 4월 1일부터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태어난 일간지는 반혁명당을 대변하는 ‘드 스딴트아르트’(De Standaard)였고 카이퍼는 그 일간지 편집장도 맡게 되었다.
흐룬은 자신이 1560년에 기독교국립학교교육협회(de Vereniging voor christelijknationaal schoolonderwijs)를 세우고 의장이 되었다. 그가 카이퍼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69년 5월 18일 저녁, 기독교국립학교교육협회 모임이 네덜란드 중부도시 위트레흐트(Utrecht)의 돔 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였고 카이퍼는 그 모임에 앞서 연설을 맡은 연사였다. 그날 저녁은 카이퍼의 미래에 결정적인 날이었는데, 그의 연설을 들은 청중 가운데 흐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첫 만남에 둘은 이미 서신교환을 통해 서로를 알고 있었다. 남아 있는 최초의 서신은 카이퍼가 쓴 1864년 10월 6일자이고 흐룬의 답장은 14일자이지만 본격적인 서신교환은 1867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평가된다.
카이퍼는 흐룬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 개인적인 만남은 카이퍼 박사에게 매우 강력한 인상을 주었는데, 그가 이때부터 흐룬의 영적 동반자(geestverwant), 아니, 그의 영적자녀(geesteskind)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흐룬 판 프린스떠러르와의 이 개인적인 교제는 카이퍼 박사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으로 남았다.” 카이퍼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흐룬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흐룬은 법학자이고 카이퍼는 신학자인데, 두 인물 모두 역사가이자 정치가라는 점은 중요한 공통분모다. 또한 둘 다 그들의 조국 네덜란드 국가와 그 역사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두 인물의 첫 만남 이후 흐룬도 「네덜란드 사상」(Nederlandsche Gedachten)이라는 간행물에서 첫 만남에 대해 짧게나마 카이퍼를 “반혁명당 미래 지도자”(de toekostige leider derAntirevolutionaire Partij)라고 공적으로 추켜세웠고 흐룬과 카이퍼는 공립학교가 공교육에서 기독교신앙을 배제한다는 ‘공립학교의 불신앙선전운동’(ongeloofspropaganda der Openbare School)에 반기를 들고 투쟁하기로 의기투합했으며 흐룬처럼 카이퍼도 1869년에 윤리적-평화적인 기독교 정치인들과 다른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카이퍼처럼 흐룬도 칼빈주의 종교개혁(Calvinistische Reformatie)이 네덜란드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1864년부터 시작된 카이퍼와 흐룬 사이의 교환서신은 흐룬이 사망한 1876년까지 모두 500통이 남아 있다. 카이퍼의 정치적 견해를 명시한 저술 『우리의 강령』은 1879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으나 카이퍼가 흐룬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강령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초판 출간 10년 전인 1869년 5월 15일이다. 여기서 카이퍼는 주장하길, “[우리가] 차분하게 ‘우리의 강령’을 협의할 경우, 저는 그것이 우리가 일치하는 원리들에 도달함으로써 그것을[=우리의 차이점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 역사적 일치에 대한 논란의 여지없는 주요 특징들을” 언급한 흐룬의 5월 13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흐룬은 1876년 5월 19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가 카이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1876년 3월 8일자였다. 흐룬과 카이퍼 사이의 정치적 동료의식을 싹트게 만든 이슈는 공립학교에서 기독교신앙교육을 금지하는 교육법에 반대하는 기독교 학교운동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카이퍼는 “반혁명적, 즉 기독교 역사적”이라는 흐룬의 정치적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흐룬을 계승하여 그것을 기독교 정당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흐룬의 예언대로 카이퍼는 “반혁명당의 미래 지도자”로서 독보적이고도 특출한 정치가의 능력을 발휘했다.
흐룬이 자신의 반혁명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해, 즉 “반혁명적 방향이 태어난 해”(het geboortejaar der anti-revolutionaire richting)는 1830년이다. 왜냐하면 1930년에 1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혁명적 방향과 반혁명당이란 표현은 여러 면에서 동일한 사상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완전한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다. 방향은 정당보다 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반혁명적 방향의 탄생이 1830년이라면 반혁명당이 태어난 해는 반혁명 개념이 정치화 한 1871년이어야 하겠지만 정당조직 50주년을 기념하는 해는 1928년이므로 반혁명당은 1878년에 조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반혁명당(ARP)의 공식 설립일은 1879년 4월 3일로 알려져 있다.
Ⅲ. 반혁명적 정치원리
카이퍼는 22장으로 구성된 『우리의 강령』의 목차와 서문 사이에 일종의 반혁명당 선언문 21개 조항을 ‘강령’(Het Program)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 강령 끝에 “이 강령은 하원의원의 선거에 반혁명파의 계획을 참고하도록 1878년 1월 1일에 중앙위원회를 통해 확실히 보내어졌다.”는 내용이 괄호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강령의 작성 목적이 국민선거를 위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서문(Inleiding)에서는 강령의 세 가지 성격을 세개의 절(§)인 “투표 강령”(Stembus-program), “통치 강령”(Regeerings-program), “원리 강령”(Program van beginselen)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책의 목차 앞 서언(voorrede)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강령의 주요 내용만 인정한다면 누구나 반혁명파 지지자들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만일 [우리가] ‘강령’ 자체의 주요 사상들만 고백한다면 동지인 우리 각자는 손상되지 않은 권리를 가지고 효과적으로 ‘각자 자신의 길’로, 예컨대 우리와 완전히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반혁명파란 무엇인가? 강령 1조의 해설인 1장 “우리의 방향”(onze richting)에서 ‘반혁명적 방향’이란 프랑스혁명(de Fransche revolutie)처럼 “헌법적이고 사회적 제도”(het staatsrechtelijk ensociaal systema)를 지향하는 무질서한 혁명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혁명적 방향’과 달리, ‘기독교 역사적 방향’이라는 용어에서 ‘기독교적’이란 하나님을 완전히 부정하고 배제하는 “인본철학”(humaniteits-philosophie)을 반대한다는 의미이고, ‘역사적’이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역사의 권리”(het rechtder historie)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카이퍼에 따르면 ‘반혁명적’이란 용어와 ‘기독교 역사적’이란 용어의 의미는 개념상 다르면서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이것은 흐룬의 저술 『네덜란드 개혁교회 속의 반혁명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정]당』(Le parti anti révolutionnaire et confessionel dans l’Eglise Réformée des Pays-Bas)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다.
카이퍼는 정부가 오직 죄 때문에 존재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동의한다. “어떤 죄도 없고 모든 것이 잘 작동했더라면 어떤 정부도 전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퍼는 죄를 “매우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타락으로”(als van een zeer positief, alles verstorend en verwoestend bederf) 간주한다. 카이퍼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을 신정주의자들(theocraten)로부터 분리한다. 왕위의 죄인(zondaar op dekroon), 의회실의 죄인들(zondaren in de raadszaal), 연구실의 죄인들(zondaaren in het studeervertrek), 기표소의 죄인들(zondaaren bij de stembus) 등등 어느 분야, 어느 장소 가릴 것 없이 죄인이 없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정치영역(staatkundig terrein)에서 하나님 말씀의 영원한 원리를 고백하면서 양심에 호소한다. “국가의 권위가 하나님에 법령에 얽매이는 것은 직접적으로도 유일한 교회의 선언을 통해서도 아니며, 단지 정부 인사들의 양심으로만 그렇다.” 하나님의 법령은 “정부의 양심”(de conscientie der overheid) 즉 정부 인사들의 양심을 통해 작동한다. 양심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모든 죄인에게 남아 있는 것이므로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카이퍼는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정부들에게 옳고 그름을 결정한 “주권”(de souvereine macht)을 주신 것이라 전제한다.
카이퍼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결정하고 그것을 법으로 결정하는 입법 문제를 오늘날 국회와 같은 독립된 입법부 즉 국회의 일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정부의 일로 간주한다. 하나님께서 입법 권한을 정부에 위임하신 것이므로 “모든 입법”(alle rechtsbepaling)은 “하나님의 뜻”(Gods wil)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정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는 그 나라에서 무엇이 옳을지 결정할 권한이 있고, 필요한 경우 무력으로 그 옳음을 지킬 의무가 있다.” 정부는 입법의 권한뿐만 아니라, 그 법을 집행할 권한도 있다.
정부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정부가 옳은 것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정부의 역할도 객관적으로 정의로운 법을 국법에 반영하는 정도로 제한되어야 한다. 옳음 즉 정의가 입법의 기준이므로 입법 원리에 대한 지식은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공부와 하나님의 법령 연구를 통해”(door de studie van Gods Woord en het onderzoek naar Gods ordinantiën) 획득 가능하다. 성경 이외에는 어디서도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기준(maatstaf)을 발견할 수 없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참되고 유익하고 영원한 법 원리들에 대한 지식의 신뢰할만한 출발점은 역사에서도, 법학에서도, 철학체계에서도 제공되지 않았다.
자연과 인간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법령이란 하나님의 뜻과 명령과 법령이 세상의 모든 것에 연관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죄로 인해 그 관계가 가려지고 뒤틀리고 왜곡되었다. 카이퍼는 “죄를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확실히 법의 영역에서조차도 분열시키고 어둡게 하며 깨뜨리는 권력”으로 정의한다. 이와 같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군주들에게는 여전히 자연적 신지식이 작동하고, 도덕법이 양심에 소리치며, 수치스러운 것에 대한 상식이 덕을 보호한다.” 카이퍼는 그것들을 “정의의 지지들”(de steunsels der gerechtigheid)이라 부른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반은총적인 요소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로는 “하나님의 보다 높은 법령에 대한 정확한 지식”(de juiste kennis van Gods hoogere ordinantiën)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를 통해서만 발견된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수용하면서도 “치국과 입법과 사법”(landsbestuur en wetgeving en rechtspleging)을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법령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도덕한 반쪽짜리”(een onzedelijke halfheid)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카이퍼는 자신과 같은 반혁명자들(antirevlutionairen)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선언한다.
1. 지상에 유효할 모든 정의로운 것은 정의로 시험되어야 한다.
2. 정의를 하나님만이 자신의 거룩한 존재의 성품대로 결정하신다.
3. “인간의 삶”에 관한 한, 이 법령의 순수한 지식과 견고성은 죄로 상실되었다.
4. 자연적인 신지식과 자연적인 법인식이 아무리 가치 있다 해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영
원한 원리들을 알려주기에는 불충분하다.
5. 하나님의 말씀의 특별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 저 원리들에, 시민의 삶에 관한 [원리들]에도, 빛이 주요하게 공급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명은 정치 영역에서도 저 하나님 말씀의 영원한 원리들을 고백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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