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소설가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대표작 『섬』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책에서 장 그르니에가 말한 건 아무것도 없다. 독자들이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두었다.”
카뮈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의 책 서문에 고전을 읽어야 하고, 읽을수록 좋은 이유를 명쾌하게 썼다(고명환, 고전이 답했다 (라곰, 2024), 6).
위대한 고전을 남긴 작가들은 모든 것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은유와 상징’. ‘비유와 압축’을 통해 읽는 사람이 스스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석하게 만든다. 그 해석도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늘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게 하는 쪽으로 인도한다. 옳은 얘기다. 고전을 많이 읽어본 나로서도 동의하는 바다. 저자의 의도가 명확해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독자들이 영향받게 하는 책들도 많다.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결론 내리지 않고 독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적용하도록 열어놓은 책들도 꽤 있다. 이런 책들이 귀한 작품들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로 유명하다. 에디슨이 강조한 부분은 ‘1% 영감’일까 ‘99%의 노력’일까? 후자가 아니라 전자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강조되어 활용되고 있다.
그 사실을 안 에디슨이 자신의 말을 전해준 기자들을 모아놓고 화를 내고 호통을 쳤다. 그는 ‘자신이 강조한 것은 99%의 노력이 아니라 1%의 영감인데, 어째서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전달했느냐?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해도 1%의 천재성이 없으면 안 된다’라며 다시 자신의 의도를 밝혔다. 하지만 에디슨의 의도와는 달리, 정작 사람들은 ‘천재성이 없어도 열심히 노력하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있다.
천재성을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그 말은 원래 에디슨이 의도한 바와는 달리 적용되어 온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고 유익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원래 말한 이의 의도와 달리 활용되어선 절대 안 되는 예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Boys, be ambitious!”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국의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의 농학 대학의 교수였고, 일본 홋카이도대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가 원래 남겼던 말은 “Boys, be ambitious!”가 아니라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소년들이여, 그리스도를 위한 야망(비전)을 가져라!”이다. 클라크로부터 영향받은 제자들이 그의 말을 그림과 함께 새겨놓았는데, 우상을 섬기는 일본인 중 어떤 이가 거기서 ‘for Christ!’를 빼버린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가 들어가고 빠지고에는 천양지차의 갭이 있다. 이런 경우는 원래 말한 이의 문장이 한 단어도 빠짐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성경 저자의 의도’ 역시 마찬가지다. 무조건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는 쪽으로 해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큰 자’라는 뜻을 가진 사울이 변하여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다.
“‘큰 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작은 자’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고 하면 겸손해 보이기에 감동받을 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감동이란 게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성령이 주신 역사에 의한 감동일까,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에서 비롯된 인간의 무지와 착각에서 온 긍정적인 효과일까? 법륜 스님의 강연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감동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감동이 사람이나 책에서 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잘 구별해야 한다.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된다고 다 좋은 건 아니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의 참 저자이신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 감동과 은혜라야 사람을 제대로 살리고 바꿔놓을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신적인 역사에서 주어지는 생명력 넘치는 창조적인 열매’와 ‘인간들에게서 비롯된 긍정적인 효과들’을 잘 구분해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사고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치명적임을 알아야 한다.
이단에 빠진 이들 다수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던 이들임을 기억하자. 몸에 좋은 보약이라고 먹다 보면 독약을 섭취할 수도 있음을 경계하라. 그런 이유로 말씀을 사랑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오늘의 나처럼 본문 저자인 성령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다. 그러다가 온전한 뜻을 밝히 알게 되면 더없이 기쁜 행복감에 젖어 드는 것이다.
그렇다. 천국뿐 아니라 성경도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우리 모두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되새기고 숙고함으로 말씀 속에 감추인 산삼을 송두리째 캐내어 섭취하는 행복에 잠겨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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