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회(査經會)와 지도자 수련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 하위렴 선교사가 군산에 부임하던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정미의병의 여파로 기독교에 대한 수용성이 크게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곳곳에 교회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으나, 교회 숫자에 비교해 목회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대다수 교회는 선교사들이 기껏해야 일 년에 두세 차례 순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두세 차례를 뺀 나머지 주일은 선교사를 대신해 조사나 각 교회의 평신도들이 인도해야만 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지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한 선교부 전체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로 현지 지도자들의 양육과 수련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선교사 공의회에서도 거론이 되던 시점이었다.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는 최근 모임에서 조선에 540개의 교회에 46명의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고 보고했으며 (그 중)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65개의 교회와 9명의 목회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교회마다 일주일에 한 번에서 세 번 정도의 설교를 해야 했고, 주일학교를 운용하고 있는 교회도 많았기 때문에 이 모든 예배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라도 다수의 현지 지도자들을 고용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선교사들을 돕는 유급 조사들이 있긴 했지만, 이들과는 별도로 자질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가난한 형편이라 시간을 따로 내어 공부에만 전념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선교부 자체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지도자 양육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어놓아야 할 판이었다.

선교부에서 궁리한 끝에 제시한 방법은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그들을 모아 2~4주 정도 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이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연례회의에 의제로 올려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세우고, 이들을 3개 클래스로 나누어 운용하기로 결의했다.

"첫 번째 클래스"는 현지 지도자와 조사들을 상대로 하되 군산에서 1월 1일부터 3주간 열기로 했다. 3개 스테이션에서 125명 정도의 규모로 하되 진도에 따라 네 개 반으로 편성하고, 강사는 군산지부 선교사들 외에 전주와 광주 그리고 북장로교 평양지부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사경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여행경비와 숙식의 삼 분의 이는 각자 본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두 번째 클래스"는 3개 선교부에서 각각 나누어 진행하는 모임으로, 대상은 학습 교인 이상으로 하되 참가자는 백 명 정도로 규모로 예상했다. "세 번째 클래스"는 각 교회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하되, 지교회의 교사 양성을 위한 코스로 조사들이 교사로서 활약하는 것으로 했다.

선교부에서는 이 훈련 프로그램을 사경회라 이름했는데, 개교회의 지도자나 조사 외에 신학교에 갈 지망자를 대상으로 매년 1회, 3주간씩 4년간 선교부 차원에서 실시하는 대사경회Mission Training Class와 학습 교인 이상을 대상으로 지부 차원에서 주관하고, 상황에 따라 열흘에서 2주간 정도 진행하는 중사경회Station Training Class 그리고 개교회 차원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소사경회Bible Class in the Outstation로 나누었으며, 소사경회는 주로 선교사나 조사가 진행하되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이 소사경회를 통해 독신 여전도사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지도자를 대상으로 하는 대사경회나 교회 자체에서 실시하는 소사경회보다는 선교부에서 관할 교회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사경회의 인기는 대단했다. 대개는 스테이션에 위치한 구암교회나 영명학교에서 열리곤 했는데, 옥구, 익산, 김제는 물론 멀리는 부여 등지에서도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참가하는 교인들은 보름치 자신의 양식을 들고 와, 선교부에서 제공하는 천막 숙소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남성 반과 여성 반이 모이는 시간대를 달리해 진행했으며, 전북지역에서 개최하면 전남지역의 선교사들이 강사로 참여해 도왔고, 반대로 전남지역에서 개최하면 전북지역의 선교사들이 번갈아 강사로 참여해 주제별로 각자의 과목을 나누어 강의했다. 물론 참여한 교인들의 대부분은 성경공부가 주 관심사였지만, 한편으로는 타 지역 교인들과 친교를 통해 결속을 다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며, 선교사들을 통해 듣는 나라 안팎의 소식에도 큰 호기심을 갖기도 했다. 강의가 끝난 저녁 시간에는 으레 전도 집회가 열려 사경회의 열기를 달궜다.

하위렴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사경회를 시도했다. 물론 이러한 현지 지도자를 위한 양육 프로그램은 선교사 공의회 산하 다른 교단에서도 사경회라 이름해 이미 실시하고 있었지만, 하위렴은 참가 대상의 수준을 고려해 단계별로 반을 나누어 운용하고, 농번기를 피해 실시해 농촌 지역의 형편에 맞게 특성화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 이후로도 사경회Bible Training Classes는 선교부의 연례행사가 되면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체계적인 성경공부로 자리를 잡아갔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성장에 사경회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고 선교사들이 회고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에 사경회가 정착되면서 사역자나 평신도들을 위한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으로 파생되기도 했다.

하위렴은 그해 대사경회(Mission Training Class)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선교부 연례회의에 그 운용(1906.1.19.)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일 년에 한 차례 선교부에서 개최하는 행사로 참가 자격은 세례교인 가운데 선교사들에 의해 지명을 받은 자로 제한하되 여행경비와 숙박비 일부는 자비 부담으로 하기로 했다. 하루 벌어 근근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조선인에게 하루 품삯은 생계에 영향을 줄 만한 액수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시간과 돈을 들여 사경회에 참가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음에도 군산 선교지부 여러 교회에서 70명이 넘게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15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걸어와 참석하기도 했다."

"(금년 군산에서 개최된) 대사경회의 강사는 오웬 목사와 군산 선교지부 하위렴, 부위렴 목사와 북장로교 평양 선교지부에서 온 그래함 리Graham Lee 목사로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소요리문답, 구약사와 설교학 등을 가르쳤다.“

"클래스를 3개 반으로 등급을 나누어 매일 강의했으며, 한 주간의 3일 저녁은 다양한 주제들을 선택해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위렴은 대사경회에 이어 열렸던 중사경회(Station Traing Class)의 경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곧바로 2월에는 군산지부 소속교회의 남자들만을 위한 중사경회(Station Traing Class)를 개최했다. 10일간의 성경공부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하자 60여 명이 넘는 사람이 참가 신청을 했다. 대사경회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이 자신의 경비를 스스로 부담케 했으며 강사는 하위렴, 부위렴, 전주교회에서 온 김 장로 그리고 궁말교회의 양응칠 조사가 맡았다. 중사경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고무적이었는데 특별히 명석하고 성실한 양반 출신의 젊은이들이 관심을 보여 앞으로의 전도가 유망해 보였다."

하위렴을 중심으로 지부의 선교사들이 함께 힘을 합쳐 대사경회와 중사경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실제 사경회를 준비하느라 지난 한 해 동안 준비와 진행을 위해 할애한 시간만 해도 그들 한 해 사역의 삼 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해에 대사경회와 중사경회가 잇따라 열린 데다 거기에 사경회 강의와 영명학교 수업까지 겹치는 바람에 선교사들은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다. 부위렴 선교사는 사경회 강의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바쁜 하위렴 선교사를 대신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해 군산지부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사경회였으나 선교사들은 물론 참가자들 모두가 만족해했다. 변변한 평신도 훈련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이라 사경회는 교회마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교회와 교인들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비록 평신도 지도자 자질을 함양涵養하는 수련 과정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과정을 넘어 목회자 지망생을 선별해 내는 방편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위렴은 그해(1906) 개최된 대사경회를 통해 발굴된 5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목회자 지망생으로 추천하고 그들을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사경회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나서 각 교회에서 활동하던 조사들 가운데 다섯 명이 목회자 지망자로 허락되어 그들 중 넷은 오 년제 평양신학교로 나머지 한 사람은 숭실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추천한 목회자 지망생의 학교생활을 학교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양육과정을 살피기도 했다.

일례로 하위렴 선교사의 추천으로 신학교에 들어간 양응칠이 얼마 가지 않아 그의 학업 성취도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믿음과 헌신만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수학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당시 교장이었던 마펫 박사는 하위렴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부진한 성적을 상의하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교장인 마펫 박사가 나에게 편지하기를 양응칠은 한 과목 이상 낙제한 유일한 학생이며, 한문을 읽지 못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그러나 이 두 학생은 다 좋은 학생이어서 목회에서 제외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한글 교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고 소견을 제시하면서 양응칠은 신학과 유대사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하위렴은 '비록 그가 학업에는 부실해서 매년 한두 과목씩 과락이 있었다 해도, 3학년에 올라가 통과하지 못한 모든 과목을 재수강하면 될 것'이라고 학교 측에 부탁하면서 '그가 처음 교회에 나올 때 이미 중년의 나이로 한글도 읽지 못했던 점을 참작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하며 양응칠을 감싸기도 했다.

한편 양응칠과 달리 그해 숭실학교를 졸업하는 김창국의 학업 성취도와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는 크게 만족을 표시했다. 김창국이 숭실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군산으로 내려와 영명학교와 교회부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대견해하기도 했다.

"지난 가을학기 숭실학교에 보낸 또 한 사람 목회지망생 김창국은 양응칠과 달리 좋은 성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자신의 기숙사비를 충당했는데 그는 학교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름에는 시골교회 부설 학교의 교사로 일하기도 하면서 이번 가을학기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평양신학교 본관
평양신학교 본관

한 해(1907) 동안 신학교 지원자를 한 사람밖에 발굴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도 목회자 지망생을 아무나 추천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질을 갖춘 목회자를 선별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심사숙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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