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7회 학술발표회 개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7회 학술발표회 참석자 기념 사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최근 제427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진행됐다. 이날 ▲김가흔(서강대 사학과 박사수료)가 ‘1960년대 후반 기독교 빈민운동의 역사적 의의-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이용상(우송대학교)가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의 활동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1960년대 후반 도시화 속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빈민운동

먼저, 이가흔 교수는 “1960년대 후반 한국은 근대화를 표방한 산업화 정책으로 도시화 문제가 심각했다. 특히 도시화의 과정에서 고통받는 도시빈민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된 이래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실천을 하던 한국의 기독교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춘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며 “1968년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의 설립과 실무자 훈련프로그램 설치는 이러한 모색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와 훈련프로그램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며 “하나는 연구소의 설립과 프로그램의 운영에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부의 도움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심지어 프로그램 담당자로 허버트 화이트(Herbert White) 목사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다른 하나는 개신교 재단인 연세대 안에서 실시된 훈련프로그램이었지만, 위원회의 구성이나 훈련 참가자에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주교까지 두루 포함된 신·구교 연합활동이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실무자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도입된 주민조직론(Community Organization/C.O.)이 훈련지역에서 성과를 거두자 이후로 여러 현장에서 C.O.방법론이 확대되어 갔다”며 “비슷한 시기에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에서도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만들어 C.O.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했다”며 “다만 학생 단위의 현장 참여 활동이라 방학 때 단기 활동으로 그쳤기 때문에,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의 설립이 기독교 빈민운동의 시발로 간주되곤 한다”고 했다.

이가흔 교수는 “1969년부터 시작한 도시빈민을 위한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은 두 가지 세계교회의 흐름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며 “하나는 교회일치 운동(에큐메니컬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교리의 정립(천주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바탕으로 한 사회참여적 선교 방법론의 형성”이라고 했다.

이어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이 두 집단 모두 시대의 아픔과 함께할 수 있는 현장으로 나아가게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연세대학교에 도시문제연구소가 설립된 이래,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 같은 공동의 단체를 설립하기도 하는 등, 연합 활동에 노력해 오던 신·구교는 도시의 여러 현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일부 현장에서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며 “당시 현장의 활동가들은 대체로 신구교 신학생, 학생운동 출신 그룹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학생인 동시에 훈련생이었고, 실무자인 동시에 활동가였으며, 빈민운동을 위한 일꾼이었다”고 했다.

특히 “대학가에서의 투신이 적지 않았다. 4.19 이후로 형성된 대학가의 운동권 그룹은 사회참여를 위해 빈민운동, 노동운동 등의 현장으로 들어갔고 소위 학출 1세대를 형성하게 된다”고 했다.

또한 “1970년대 초반은 엄혹한 독재 정권이 더욱 장기적인 집권을 위해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였고, 빈민운동 또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다”며 “아직 활동가 그룹이 영역별로 분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전적으로 빈민운동에만 투신했던 것이 아니고 독재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 또한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가흔 교수는 “정치적 박해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빈민운동에 제약이 가해졌지만,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빈민운동이 독자적 영역으로 분화되어 갔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의 파급력과 동력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했다.

아울러 “수도권의 활동은 이후로도 지속되기는 했으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면서 대중과는 유리되어 갔다”며 “빈민이 다시금 대중에게 가시화되는 것은 1980년대에 새로운 군부 정권이 들어서고 합동재개발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규모 철거가 진행되는 시기의 일이 된다”고 했다.

◆ 아리요시 주이치, 조선총독부의 총독·정무총감 중 유일한 기독교 관료

이어 두 번째로 발제한 이용상 교수는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는 교토 미야즈 출신으로 1922년 6월 15일부터 1924년 7월 4일까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맡은 인물”이라며 “그의 가족은 아버지 有吉三七(미야즈 번 번사), 아리요시의 형제로서 아리요시 아라키(有吉明, 기독교인, 외교관)、아리요시 미노루(有吉実, 1930년 8월부터 미야자키현 지사)가 있다”고 했다.

이어 “당시 아리요시가 활동한 시절은 일본에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자가 급격히 증가한 시기였다. 아리요시는 평생 기독교인으로 활동했다”며 “또 아리요시는 조선총독부의 총독, 정무총감 중에서 유일한 기독교 관료로 알려져 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아리요시의 관료로서의 활동에는 산업 발전, 부흥 사업 등을 포함한 교육, 교회 관계 활동이 많았다”며 “특히 문화, 운동, 여성과 청소년에 관심을 갖고 내무관료로서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또 “그의 신앙을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YMCA 등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례와 매일 성경을 읽은 기록이 있고 기독교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해외 선교사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며 “학교와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신앙에 접목하려고 노력하였다. 관동학원 대학 등의 기독학교 설립의 중요성을 알고 적극 추진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리요시는 내선 일체를 강조하는 등 식민지 관료로서 한계도 보이고 있었다”며 “아리요시는 일본은 문화정책을 주도하고, 교육, 산업, 그 외 모두에서 내선 일종의 동화를 목표로 황민화를 목표로 이를 철저히 실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조선의 철도부장관, 만철 총재였던 오무라 다쿠이치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리요시에게도 인류애과 식민지 관료로서 틈새에서 고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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