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67) 일본 자민당 신임 총재가 지난 1일 일본 국회(중의원) 본회의에서 제102대 총리로 선출됐다. 일본 정치인으로선 보기 드물게 기독교인인데다 온건 친한파로 분류되는 정치인이 집권당 총재에 이어 총리 자리에 오름으로써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는 한일 관계에도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12선 국회의원이란 관록이 말해주듯 이시바는 일본 자민당 간사장과 방위성·농림부 장관을 지내는 등 선이 굵은 정치인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하지만 유독 자민당 총재와는 인연이 없었다. 이전에 네 번 자민당 총재 선거에 도전했다가 모두 실패한 사례가 잘 말해준다. 그런 만큼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자 아베’로 불리는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경제안보상에게 1차 투표에서 뒤져 패색이 짙었으나 2차 투표에서 극적으로 판세를 뒤집은 것이다.
‘4전5기’ 신화의 주인공이 된 이시바가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가 된 배경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 등 주류 세력과 일정 거리를 둔 소신 정치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자민당 내 주류인 아베 전 총리계로부터 선거 때마다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됐다.
한일 역사 문제에 있어 자민당 내 주류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 온 것도 그가 비주류가 된 요인 중 하나다. 그는 과거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역대 총리가 사죄의 뜻을 밝혔음에도 한국에서 수용되지 않는 것에 좌절감이 크다. 그럼에도 납득을 얻을 때까지 계속 사죄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그의 이런 태도는 일본 내 주류 세력인 보수 우익과 정치적 결이 확연히 다름을 보여준다.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잊지 않고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에 대해 주류 세력이 견제와 거리두기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건 그의 이런 정치적 성향이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일본 언론에서 나오는 점이다. 보수 우익에 속한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끝없는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등의 남 다른 정치적 소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증조부에 이어 4대째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다. 기독교 인구가 0.4%에 불과한 일본에서 4대째 기독교 신앙의 길을 걸으며, 정치인으로 12선 국회의원을 하는 등 오랜 기간 입지를 다져 왔다는 사실은 토속 신앙에 물든 일본 사회에선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돗토리현에서 보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유치원에 다니고 일본기독교단 소속의 돗토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도쿄대 정치학과에 진학하면서 도쿄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도 했던 그는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자신이 기독교 정치인임을 가감 없이 드러낸 신실한 정치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 기독교인과 교회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밤에 온통 십자가 불빛으로 뒤덮인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런 일본 사회 분위기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당당히 밝히는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니 처음부터 고난을 각오하고 비주류라는 가시밭길을 자처한 게 아닐까 싶다. 그가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주류 후보에게 역전승을 거두자 일본 내 주요 언론들이 “비주류가 주류가 됐다”는 제목의 속보를 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해 왔다는 점이다. 그는 일본 기독 언론과의 인터뷰 때 신앙인 정치인으로서의 자세와 기도생활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8장을 인용해 자신은 평소 기도할 때 “당신의 일에 나를 사용해 주소서”,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옵소서”라고 간구한다고 밝혔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일본 내 보수 우익 정치인과는 아주 다른 행보를 보여 온 이시바 총리의 부임으로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가 식민 지배나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과거사 문제에 꾸준히 반성의 뜻을 밝혀 왔다는 점에서 교착 상태에 있는 한일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하지만 일각에서 한일 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조심스런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치인은 맞지만 일본 총리로서 수행해야 할 정치적 역할을 뛰어넘긴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와교 전문가들은 윤석열 정부 이후 이어온 관계 개선의 흐름은 계속 이어지되 두 나라 사이에 민감한 사안에 있어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견지하는 이상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라고 조언한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비교적 일찍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으나 막부시대부터 이어진 기독교에 대한 탄압으로 기독교회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대표적인 나라중 하나다. 하지만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땅에 떨어지고도 복음의 불모지가 된 일본에서 4대 신앙을 이어온 기독교인이 일본 정부의 수반으로 등극하게 된 건 정치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그의 정치 여정은 지금까지 기독교인 정치인으로서 걸어온 길보다 훨씬 험난한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다. 집권당의 총재이자 정부를 이끄는 총리인 이상 국익과 정당의 기본 노선을 따르는 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주님이 그와 함께 동행하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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