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교회
만자산교회(후에 지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오원집이 하위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조사가 되어 순회사역을 돕기도 했는데 그가 익산군 북일면 고현리로 이사하면서 친구인 오덕근, 김자윤, 오덕순 등과 함께 만자산교회에서 분립했다. 곧바로 곽도일의 사랑채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마침내 1906년 6월 1일 하위렴 선교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고현교회가 시작되었다.
대붕암교회(제석교회)
하위렴의 인도로 웅포면 대붕암리에 살던 엄주환, 강진회, 홍종익, 송원규, 강두희, 강문회 등 몇 사람이 1906년 12월 25일 첫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1908년에 홍종익, 홍종필 형제가 군산에 이사하면서 자신의 집을 희사喜捨하자 그 집을 예배당으로 개축하고 대붕암교회(후에 제석교회)를 세웠다.
웅포교회
군산에서 배를 타고 상류 쪽으로 12Km 떨어진 곰개 나루(웅포) 주변에 장이 서는 큰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을 찾아간 하위렴 선교사와 조사 양응칠의 전도로 황재삼과 김한녀가 믿기 시작했고, 또다시 그들의 전도로 35명 정도의 젊은이가 모이면서 웅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친일 단체 일진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모임이었는데 그들의 관심과 행위가 오직 그것으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과연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지는 불확실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쪽 복음을 구입해서 꾸준히 말씀을 배워왔던 터라 설사 그 모임이 흩어진다 해도 그들 중 몇 사람이라도 믿음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후에 초기 신자였던 황재삼이 하위렴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웅포교회 초대 당회장으로 시무하기도 했다.
선리교회(무형교회)
익산군 망성면의 선리를 순회하는 동안, 어떤 교인이 묘지를 새롭게 치장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하위렴 선교사는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부친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선친께서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이 자리가 명당'이라고 하는 한 지관地官의 말을 듣고 한양에 있는 아버지의 유골을 이곳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명당에 이장移葬하면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미신적 풍습을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굳게 믿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선리교회는 후에 무형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황산교회
황산포는 행정구역상 지금은 충남 강경읍에 속해있지만, 그 당시는 전북 여산군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이 황산 나루터에 최초로 교회가 들어선 것은 전도선을 타고 순회하던 하위렴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당시 교인들의 대다수가 금강 변의 갈대를 베어다 돗자리를 만들어 팔았는데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일해야 생계유지가 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들이 예배 처소를 매입한다고 나섰다. 그들의 빈궁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하위렴 선교사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곧이듣지 않았는데, 그러나 전 교인이 나서서 헌신적으로 헌금에 참여해 예배당을 마련하는 것을 보며 그들의 믿음에 놀라워하기도 했다.
한편 처음부터 건물의 매입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하위렴은 '천주교 신자인 건물주가 왜 그렇게 그 집을 헐값에 황산교회에 팔려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황산교회 교인들이 예배 처소를 마련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외에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황산교회는 설립 7~8년 만인 1913년 그곳의 행정구역이 충청도로 바뀌면서, 예양협정에 따른 선교구역 조정으로 황산교회는 강경에 소재한 감리교회와 통합이 되고 말았다. 이때 일부 교인들이 감리교회로 통합됨에 반발해 부근의 다른 장로교회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만자산교회(지경교회)
전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1897.4.10.) 최흥서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12Km나 떨어진 군산교회까지 먼 길을 오가며 믿음을 키웠다. 얼마 후 자신이 사는 만자산에서 가까운 이웃과 함께 2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1900년 10월 9일 만자산교회를 세웠다.
하위렴 선교사는 그가 장로로 세워지는 과정을 말하면서 '그는 누구도 시비할 수 없을 만큼 장로의 자격을 온전히 갖춘 자'라고 그의 됨됨이를 평가했다.
"최흥서는 중산층에 속한 농민으로 조용하면서도 수줍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그를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만자산교회에서 장로로 피택이 된 최 씨는 모든 면에서 장로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정을 다 마치고 하루속히 그가 장로로 세워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하위렴 선교사는 1906년 최흥서를 장로로 세우며 만자산교회를 조직교회로 출범시켰다. 호남 최초의 장로가 된 최흥서는 지역교회 형성에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장로의 신분으로 전라대리회 임시 회장서리가 되어 독노회에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최흥서는 하위렴 선교사를 도와 개복교회 설립에도 크게 이바지했으며, 하위렴은 그를 크게 신임해 군산 복음서원의 매서인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하위렴은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최흥서의 활약을 회고하며, 그는 개교회의 장로를 넘어 이 지역에 가장 필요한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고 평하기도 했다.
"최흥서는 교회를 돌보며 성경 공부를 도왔으며 학습과 세례를 준비시키기도 하고 시간을 내어 전도에 앞장서며 어떤 기대나 보수도 받지 않고 교회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했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교회에 있었고 교회를 제일 소중히 여겼다. 조금이라도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마음 아파했다. 소요리 문답과 교회 치리 등에서 그는 가장 만족할 만한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믿음과 지혜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가장 완벽한 장로에 가까웠다. (중략) 무엇보다 그의 장로 장립이 기쁜 것은 그가 이 지역에서 최초의 장로로 세워졌다는 이유 외에도, 우리들의 사역이 계속되는 동안 결코 옮겨서는 안 되는 기둥을 세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위렴 선교사는 만자산교회의 신 씨의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다. 신 씨는 믿음을 고백한 신자였으나 구습의 유혹을 버리지 못해 투전판에 빠져 수차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스스로 수없이 다짐하며 손을 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도박을 끊겠다는 다짐과 의지를 보여준다며 자기 손가락을 잘라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 후 그가 말씀으로 크게 변화를 받고 최흥서 장로를 대신하는 교회의 일꾼으로까지 성장했는데 최흥서 장로가 자리를 비우면 그를 대신해 교인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가 교인들을 가르쳐 열세 사람이나 세례를 받게 했다는 이야기라든지, 변화된 신 씨의 모습을 본 주변 이웃들이 앞을 다투어 우상을 내어 버리고 미신을 멀리했다는 이야기 등을 소개하며 복음으로 자신은 물론 이웃들까지 변화시켜 가는 신 씨의 미담을 전하기도 했다. 후에 신 씨는 최흥서에 이어 군산 복음 서원에서 매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백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