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자금 운반 중 한겨울에 해수병 걸린 뒤 돌아가셔
팔순 바라보는 최승옥 목사, 애끓은 사부곡 전해

“17살 어린 나이에 목숨을 내놓고 독립군 자금을 날랐던 아버지예요. 그렇게 군자금을 솜옷 속에 감추고 소만 국경을 드나들던 소년 독립군의 얘기는 아무도 몰라요. 딸인 제가 죽기 전에 아버지의 독립군 무용담을 알려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17살 청소년이었던 아버지가 추운 겨울 냉기가 서린 야지에서 잠자면서도 독립군 자금이 숨겨졌던 솜옷 앞자락을 움켜쥐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만에서 수십만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소리 없이 녹아들어 있다. 혹독한 일제의 탄압 앞에 그들은 자신의 자유와 재산뿐 아니라 가족과 일생을 바쳤고, 때로는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국가보훈처는 약 300만 명의 독립운동 참여자 중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15만 명으로 추산한다. 하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되는 사람은 현재 1만 8천여 명뿐이다. 학계에서는 입증 자료가 부족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2만여 명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역사의 주역들이었으나 오늘날 잊힌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는 가운데, 10대 소년 시절 독립군 자금을 날랐던 아버지 최인환 씨의 사연을 알리는 딸 최승옥 목사(미국 오순절 교단)의 애끓는 사연이 뒤늦게 알려졌다.

최승옥 목사는 “독립군 자금을 운반했던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며 “그런 나의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최승옥 목사는 “독립군 자금을 운반했던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며 “그런 나의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최승옥 목사 제공

팔순을 바라보고 있는 최승옥 목사는 “생전에 아버지는 딸자식인 저에게 너무나도 따듯한 사랑을 주셨다”라며 “하지만 아버지는 일제 치하 시절 독립자금을 운반하다 생긴 해수병으로 인해 긴 삶을 살지 못하시고 먼저 세상을 등지셨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독립운동자로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 끝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평양에 살던 최승옥 목사 가족은 최 목사가 5살이던 1951년 1.4 후퇴 때 남한으로 피란 내려왔다. 아버지가 메고 있는 이불 보따리 위에 5살 딸아이를 올려놓고 아버지 목을 잡게 하고, 1살 된 아들은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수많은 피란민과 앞다투며 피란길을 걸었다. 열흘만 있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줄로만 알았던 최 목사는 지금껏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가를 부르고 있다.

최 목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해수병으로 인해 늘 기침을 달고 있었고, 하루도 건강한 날이 없었다. 해수병은 기침을 심하게 하는 병으로, 한의학에서는 천식이라고도 한다. 최 목사의 눈에는 아버지가 숨을 쉬는 것이 항상 불편해 보였다.

말귀와 형편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나이인 중학교 2학년 때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며 해수병에 걸린 연유를 딸에게 유언처럼 말씀하기 시작했다.

최승옥 목사의 아버지 최인환 씨는 어릴 때 평안남도 평양시 보통강 근처에서 한의원을 하는 선친을 따라, 때가 되면 약을 가지러 오는 여행객 아저씨와 함께 약 보따리를 들고 따라나섰다. 그렇게 아버지와 여행객 아저씨들과 함께 먼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독립운동 본부라 하는 소만 국경(지금의 러시아와 만주 국경)의 외진 산골짜기였다. ‘어른들의 약속’이 있었다는 것은 해방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약속은 바로 독립군 군자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다녔던 소만 국경을, 인환 씨도 나이가 들어 청소년이 되자 독립군 자금을 나르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인환 씨와 함께 단짝을 이뤄 군자금 전달 심부름을 했던 이는 영화감독이었던 전택이 감독이었다고 한다. 최 목사는 “아버지 말씀으로는 ‘택이와 같이 할 때는 무섭거나 불안하지도 않고 외롭지 않았다’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인천 계양구청이 발급한 최인환 씨 출생증명서(왼쪽)와 생전의 모습(오른쪽)
인천 계양구청이 발급한 최인환 씨 출생증명서(왼쪽)와 생전의 모습(오른쪽) ©최승옥 목사 제공

독립군 자금을 전달할 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됐다. 추운 겨울에는 솜옷을 입혀 보내면서, 앞 솜옷 앞도련을 뜯어 지폐를 돌돌 말아 집어넣고 길을 떠나게 했다. 약 심부름이 없을 때도 두세 달에 한 번씩 평양에서 모은 군자금을 솜옷 속에 감추어 전달하곤 했다.

낮에는 시장 어귀에서 맴돌다가, 밤이 되면 마적단과 마을 주민을 피해 산행만 계속했다고 한다. 이렇게 독립군 자금은 어린 소년에 의해 평양에서 소만 국경, 즉 소련과 만주의 국경에 있는 김좌진 장군이 속한 독립군에게 3년 동안 전달됐다. 평양에서 소만 국경은 지금의 소련과 중국 만주 국경 사이로, 직선으로 600km를 넘는 먼 거리를 17살 어린 소년이 왕복한 것이다.

특히 추운 겨울에 눈이 무릎까지 쌓인 산속을 헤매다 길을 잃기도 하고, 사나흘씩 겨울 산속에서 밥을 굶는 일도 일쑤였다고 한다. 최 목사는 “밤에 가랑잎을 긁어모아 깔고 덮고 쪼그리고 잠을 청하다가, 쓰러진 나무토막인 줄 알고 베었던 베개가 꿈틀거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동면하는 덩치 큰 뱀이었다는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얼마나 무섭고 징그러웠는지 모른다”라며 “그렇게 한겨울 내내 냉골에서 잠자던 아버지는 냉기로 인해 기관지가 엉망으로 고장이 나 버리셨다”고 말했다.

최 목사는 “이렇게 3년 동안 독립군 자금을 전달했던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기침에서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으셨고, 시름시름 앓다가 1971년 만 60세에 돌아가셨다”라며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남한으로 피난 나온 아버지는 국가에서 병원 약 한번 공짜로 먹어본 적 없다. 또 목숨 걸고 군자금 전달 임무를 다한 아버지는 누구에게 인정받아 본 적 없고, 고향 사람도 한 명도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숨을 거두셨다”고 가슴 아파했다.

아버지가 외롭게 세상을 등진 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최 목사는 마치 고양이 숨소리처럼 쌔근거리며 토해냈던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세상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8.15 유공자 사무실을 십여 차례 방문했다. 직원들은 ‘이북에서 있었던 일이고, 본인도 고인이 된 후라 도와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최 목사는 번번이 눈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함께 군자금을 날랐던 전택이 감독도 이미 1998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최승옥 목사는 “누가 우리 아버지 무용담을 알리게 할 수 있나? 누가 우리 아버지 단명을 풀어 줄 수 있나”라며 울며 지새운 적이 수십 번이었다고 했다. 최 목사는 “17살 어린 나이에 군자금을 솜옷 속에 감추고 소만 국경을 드나들던 소년 독립군의 노력과 헌신을 국가가 인정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가족들에게 독립운동과 관련된 객관적인 자료를 요구한다. 그러나 최 목사에게는 작고하신 아버지로부터 들은 증언과 가족사진, 이북에서 내려왔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최 목사는 “지금이라도 국가에서 이런 사연을 가진 독립유공자들의 사연을 일일이 전수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최 목사는 마지막으로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아버지가 보시던 월간 ‘삼천리’라는 잡지가 있었다”라며 “그 책이 왜 폐간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당시 책 내용 중에 군자금을 옷 속에 숨겨 다니던 아이들 얘기가 나왔다고 흥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저는 지금도 독립군 자금을 운반했던 자랑스러운 제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풋풋한 애국심을, 또 솜옷 속 비밀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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