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덕(아서 킨슬러) & 신영순 선교사 부부
권오덕(아서 킨슬러, 왼쪽)·신영순 선교사 부부. ©권요한 교수 제공

프랜시스 킨슬러(한국 이름 권세열) 선교사는 1928년 프린스턴신학교 졸업 이후 조선 땅으로 와서 1970년까지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29년 그는 평양 숭실학교 교사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으며 당시 한국, 만주, 몽골 사람들에게 행할 원대한 계획의 손길이 닿지 못하도록 막는 일제의 정책들과 천황 숭배 강요에 대한 거부로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평양 숭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8년 대구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는 한편 성경구락부 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와 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했다. 그는 1970년 선교사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한인 이민교회를 돕다가 이후 1992년 소천하여 2001년 그의 아내의 유해와 함께 양화진으로 옮겨졌다. 그의 한국 사랑은 후대인 장남 아서 킨슬러(권오덕)와 동역자인 신영숙 선교사 부부와 딸 헬렌 킨슬러에게 이어졌다. 권오덕 신영숙 선교사 부부는 1960년대부터 42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한 후 2011년 은퇴했으며 그 후에도 북한 장애인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권오덕·신영숙 선교사를 만나 권세열 선교사의 사역, 선교사로 헌신했던 사역, 미국 군목과 한국 군목의 차이, 북한 관련 사역 등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권세열(프랜시스 킨슬러) 선교사
故 권세열(프랜시스 킨슬러, 오른쪽) 선교사와 故 한경직 목사. ©권요한 교수 제공

프랜시스 킨슬러(권세열) 선교사의 사역

신영숙 선교사는 “저희 아버님이신 권세열 선교사님은 1928년 평양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때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1929년 평양 광명서관 2층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셨다. 이는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한편 복음까지 전하기 위한 사회선교운동이었는데, 훗날 이 모임이 대한청소년성경구락부로 발전했다. 성경구락부 운동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져 1954년 말에는 전국에 17개 지부와 7만여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는 대형 모임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이어 “저희 아버님은 고등학생 시절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하나님 앞에 선언하셨다.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몽골에 개척 선교사로 가시려고 했는데 당시 중일전쟁이 발발해서 길이 막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평양으로 발길을 옮기셨고 평양에 정착하여 선교 사역을 하게 되셨다. 숭실학교에서 강사로 사역하시다가 1940년 일제 말기가 되었을 때 신사참배 문제로 여러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 아버님도 신사참배 거부를 하셨는데 그로 인해 추방되셨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셨다. 추방은 되셨지만 성경구락부 등을 통한 무료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청소년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셨다”고 했다.

권오덕·신영숙 선교사의 북한 사역

신 선교사는 “아버님이 소천하시기 이전 저희에게 유산을 1억 정도 남겨 놓으시고 좋은 일에 쓰라고 당부를 하셨다. 저는 1979년부터 장애인 관련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1998년 처음으로 북한에 가게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120번 넘게 북한에 방문하여 처음에는 고아,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돕다가 장애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장애인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북한 정부로부터 북한의 장애인 종합복지관을 건축할 3,600평 땅을 평양 대동강 구역에 받았지만, 2010년부터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5.24 조치가 선포되어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지금까지 복지관 건축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복지관 건축은 진척이 없는 상황이지만, 평양 동대원 지하 1층과 지상 3층에 장애인 운동관을 건축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인 권오덕 선교사와 저는 2003년 아버님의 유산으로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 등대복지회를 설립해서 권오덕 선교사는 이사장으로, 저는 상임이사로 북녘에 고아들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장애인 특수학교, 장애인 채육, 예술, 직업재활을 지원하며 2012년 런던 장애인 올림픽에 북한이 최초로 참가하도록 역할을 했다. 현재는 미국에 KINSLER Foundation을 통해서 북녘에 장애인들에게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권오덕 선교사는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6살이었던 당시 평양을 떠났지만 먹었던 평양김치 맛은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난 후 1998년 다시 북한을 방문한 뒤 북한 지원 사역에 나서게 되었다. 2003년 ‘사리원 콩우유·빵공장’, 2004년 평양의 ‘평화 우유·빵공장’, 2007년 ‘보통강 종합편의시설’ 건립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 신영순 선교사와 함께 장애인 사역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장애인 단체와 함께 북한 최초의 장애인 복지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 군종 제도의 시작에는 권세열 선교사가 있었다

신영숙 선교사는 “아버님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도우면서 열악한 상황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한국에 군목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국군목회 사무총장 김명일 목사는 “1961~1962년 무렵 연합군목회가 세워졌는데 거기에 예비역 군목과 선교사는 권세열 선교사님과 교단별로 서너 분이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했다.

권오덕 선교사의 군목 활동

신영숙 선교사는 “제 남편이 군종목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젊은 청년들이 군에 들어가면 훈련, 규율이 엄해서 정신적, 심리적으로 불안해져서 마약, 약물에 손을 대는 경우를 보게 되었다. 그런 경우 상담을 하게 되는데 상담이 군목을 통해 이뤄졌다”며 “제 남편은 1969년 4월 군목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많이 한 상담은 결혼에 관련된 상담이었으며 예비군과 미 8군에서 사역했다”고 했다.

권오덕 선교사는 “당시 젊은 청년들을 상대로 상담하면서 주일예배도 인도했다. 부대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당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위문품을 보내는 것도 군목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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