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수6:8,9)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에 7일간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흔히들 이해합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분명히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행진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모든 사람이 침묵하긴 했어도 어쨌든 완전한 침묵은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내뱉는 말은 어느 누구도 심지어 여호수아를 비롯한 지도자들도 절대로 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나안 우상 족속들이 계속해서 빤히 주시하는 중에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행진의 목적이 흔히 이해하듯 기도가 아니라 찬양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선 당연히 기도도 했겠지만, 사방이 완전히 고요한 정적 가운데 나팔 일곱이 찬양의 곡조를 울리고 있는데 과연 기도가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여리고 사건을 정말 그대로 흉내 내려면 땅 밟기 기도보다는 땅 밟기 찬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성중 백성들이 보였을 반응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풍경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神)의 놀라운 이적들로 이미 그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던 그들로선 더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저러다 어느 순간에 흉흉한 바닷물과 강의 급류가 물러가 쌓이는 것 같은 이적이 일어날지 전전긍긍했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그들로선 근처 바다 속에서 진도 9.0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엄청나게 큰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는 경보를 이미 들은 셈입니다. 거기다 도망갈 곳 하나 없이 사방이 막힌지라 언제 그 쓰나미가 덮칠지 속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행진자체가 바로 쓰나미처럼 보이는 환각 속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침묵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고대 이방 족속들은 전쟁을 앞두고는 일종의 카니발을 벌립니다. 마지막으로 진탕 먹고 마십니다. 함께 담력을 기르고 혹시 전사할지 모르니까 서로 위무하는 차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으로 진군해 진을 칠 때에 당연히 그러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낌새는 전혀 없고 밤중에 들리는 것은 낭낭하게 울려 퍼지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는 이방족속이었음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평안과 기쁨을 잠시나마 느꼈을지 모릅니다. 또 그런 고요함이 도리어 불안과 공포를 더 가중시켰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그분이 베푸신 요단의 기적을 방금 맛본 이스라엘 백성의 평강과 자유에 대비해, 우상을 섬기는 이방 족속들의 극심한 염려와 혼란이 확연하게 대조되지 않습니까? 수천 년 전의 기록임에도 마치 종군기자로 그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찬양만 한 것이 아니라 찬양대 앞에 군대를 앞세운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행진의 가장 큰 목적은 찬양이니까 찬양대를 보호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고”(4절) 있었습니다. 원을 이루며 돌았기에 만약 여리고 주민이 마음만 먹으면 후미든 측면이든 가리지 않고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앞과 뒤가 큰 의미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여리고 성을 돌았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진군하고 또 진군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과 그분이 베푸신 은혜를 상기하며 찬양만 하면서 말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요단의 너무나 큰 기적을 맛본지라 절로 감사와 찬양이 우러나왔을 것입니다.
또 그런 감사와 찬양이 있었기에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전투 방식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방식이라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적이 바로 상식적인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지 않습니까? 정상적인 상태에선 아무리 큰 승리를 얻어도 자기들이 잘한 탓으로 여기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간혹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은혜라고까지 말한다 해도 여전히 기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더러 중무장하여서 정상 전투 대오를 갖춘 상태에서 성 주위를 돌라고 명령을 내렸다면 아마도 속으로 임전무퇴의 각오를 다지며 주위 사방을 세심히 살피기 바빴을 것입니다. 찬양대의 양각 나팔도 승전을 독려하는 군가로 바뀌었을 것이며, 침묵하라는 명령마저 어기고 서로 용기를 복 돋우는 구호를 외치기 바빴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함락은 하나님에겐 너무나 당연지사였습니다. 당신께서도 40년이나 미룬 일인데 실패케 할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보다 이스라엘더러 진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을 돌리는지 보고 싶었고 또 그렇게 훈련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군대를 찬양대 앞서 세운 것도 그들을 보호하거나 실제 전투에 대비시키기 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컸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승리가 보장되어 있어도 전투를 실제로 담당하는 자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적인 전투 중에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신자가 행하는 범사가 공중 권세 잡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과 감사하는 그 마음처럼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드리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명하신 일을 수행해야 할 때에는 감사와 찬양이 반드시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일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중하고 엄숙하게 행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그것도 미지의 일을 할 때는 자연히 진지해집니다. 반면에 감사와 찬양이란 항상 자발적이고 기꺼운 마음이 동반되어야 하고 또 그러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충분히 체험한 후라야 가능합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려면 사전에 어려운 고비를 그만큼 많이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종살이를 시키고 또 광야의 연단을 거치게 만든 까닭입니다.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신자에게 다 그러합니다. 신자가 잘 믿는데도 고난이 끊이지 않은 이유입니다. 여리고는 반드시 큰 영적인 승리의 체험이 있고난 이후에 얻게 된 기적이었지, 여리고라는 기적을 체험해야만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호흡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열심과 치성이 아니라 찬양과 감사가 하나님의 큰 권능을 누리는 통로입니다. 또 그래야만 세상도 광대하신 그분을 함께 발견하고 침묵하게 되는 법입니다.
2011/8/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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