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원더랜드>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 죽음을 앞둔 이의 정신을 디지털 정보로 만들어 사후 그를 가상 세계 속으로 복제해주는 일명 ‘원더랜드’ 서비스가 상용화된 세상입니다. 유족들은 그 복제된 존재와 마치 사람을 대하듯 영상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고인을 다시 볼 수 없음에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죽음을 앞둔 ‘바이리’는 어린 딸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합니다. 가상 세계 속 바이리는 딸과 수시로 영상통화를 하면서 좋은 엄마가 되어주려 합니다. 자신은 이미 죽었고 가상의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이리는 갑자기 딸과의 통화가 불가능해지자 딸에게 가겠다며 나섭니다.
‘정인’은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연인 ‘태주’를 원더랜드 속으로 복제해 보냅니다. 영상통화를 통해 원더랜드 속 태주와 달콤한 연애를 이어가죠. 그러던 중 기적적으로 태주가 깨어나 정인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기쁨과 함께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행복일까, 불행일까
정인은 태주가 돌아오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깨어난 태주가 원더랜드 속 태주보다 못하기 때문이죠. 정인은 원더랜드 속 태주를 쉽게 정리하지 못한 채 현실의 태주와 가상의 태주를 저울질하며 갈등합니다. 손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할머니는 원더랜드 속 손자를 진짜처럼 여기며 손자의 행복을 위해 고된 일을 계속하다가 자기 삶을 파괴해 버립니다. 원더랜드 직원인 현수는 의뢰받은 서비스를 진행하다가 뜻하지 않게 친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하죠. 손녀의 상심을 우려해서 딸의 죽음을 숨겨 왔던 노모는 원더랜드 속 존재를 딸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워 갈등 끝에 서비스를 종료합니다. 이렇듯 원더랜드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는 의문입니다. 죽음으로 인한 단절과 상실의 아픔을 달래주려는 서비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옥죄며 더욱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올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에 영향을 준다면
원더랜드는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가상의 세계이지만, 원더랜드 속 존재가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원더랜드 속 존재와 영상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이권이 담긴 정보가 오갈 수도 있겠는데요. 예를 들어, 시험을 치르고 난 이가 원더랜드로 복제되면 유족들에게 시험에 관한 정보를 줄 수도 있을 겁니다. 현수의 고객은 원더랜드 속 존재로 자신의 장례식장에 나타나 조문객에게 빌려 간 돈을 빨리 갚으라고 재촉합니다. 이런 식으로 채권추심도 가능하겠군요. 급기야 원더랜드 속 바이리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자신을 그리워하는 현실세계 사람을 오히려 위로합니다. 그뿐인가요. 어린 시절 고고학자를 꿈꿨던 바이리는 원더랜드 서비스에 의해 사막을 누비는 근사한 고고학자로 복제됩니다. 그녀는 죽은 후에 꿈을 이룬 셈인데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후에라도 꿈을 이루려 한다면 꿈이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이란 퇴색되고 말 겁니다. 자, 과연 이러한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요?
육체, 영혼, 인간
아무리 고도의 기술로 복원했다고 하더라도, 만질 수 없고 온기를 느낄 수 없는 화면 속 개체를 지나치게 실재처럼 여기며 몰입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가상 세계를 존중하는 듯한 영화의 태도를 보여주는데요. ‘당신이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가 된다’는 영화 속 대사는 관객을 향하여 ‘가상의 존재가 진짜라고 믿으면 정말로 진짜가 되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부부간의 진실한 사랑과 성관계를 통해 출산된 실재하는 육신에 하나님께서 빚으신 영혼을 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육체 또는 영혼, 어느 한쪽이라도 없다면 인간처럼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죠. 게다가 인간의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의미합니다(마태복음 10:28). 그러니 인간의 사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뿐인 원더랜드 속 존재에게 애착을 보이거나 그 존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는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원더랜드 속에 부모를 둔 해리는 그 부모가 맘에 들지 않으니 데이터를 삭제해 버리고 새로운 부모를 만들어 냅니다. 새로 만들어진 부모는 종전의 존재와는 다른, 해리의 선호도가 반영된 언행을 하는데요. 해리는 미묘한 사이인 현수를 남자친구인 양 부모에게 소개하는 등, 가상 세계 속 부모와 일상을 함께 하죠. 정상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상 세계가 더 정교하고 더 실감날수록 오히려 그 끝맛은 공허할 뿐 아니라 씁쓸할 텐데 말입니다.
성숙한 이별
고인과 이별하지 못한 채 가상의 존재를 붙잡고 있는 이들이 많다면 정상적인 세상이라 할 수 없을 겁니다. 원더랜드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이별을 극복해 보겠다는 인간의 시도인데요,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죽음이란 인간이 범죄한 결과로서 주어진,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형벌이기 때문이죠(로마서 5:12). 게다가 죽음이 있으므로 인간은 성숙한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진솔하게 진단할 수 있게 되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내세의 심판을 전망하게 한다는 점에서(히브리서 9:27) 죽음이란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기독교인에게 죽음이란 그저 삶이 종결되는 지점이 아니라 영생에 들어가는 복된 관문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원더랜드라는 인위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위무를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비록 가슴 아프지만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는 것이 죽음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성숙한 태도입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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