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

하위렴 선교사 조선에 오다(1896)

조선에 파송된 개척선교사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굳은 의지를 확인한 해외 선교부에서는 조선에 지속적인 선교사 파송을 약속하며 1895년 4월에 유진 벨Eugine Bell 부부와 그 이듬해에는 하위렴William B. Harrison 선교사를 연달아 파송했다.

1896년 1월 하위렴은 단신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 미국의 퍼시픽 메일 회사가 샌프란시스코와 요코하마를 거쳐 홍콩을 잇는 정기선을 개설하고, 미국 대륙횡단 철도와 연계시키면서 상업적인 아시아 여행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용이해지던 시기였다.

샌프란시스코를 출항한 증기선이 긴 항해 끝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은 거의 2주일이 지나서였다. 곧바로 조선으로 가는 제물포 행 기선을 수소문했으나 연결되는 배편이 없어 며칠을 더 일본에서 머물러야 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전신국의 통신장비에 고장이 생겨 전보를 칠 수가 없었다. 그는 조선의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도착 일정조차 알리지 못한 채 일단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야만 했다.

당시 요코하마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는 노선은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가는 노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가사키를 거쳐서 서해를 끼고 북상해 제물포로 들어가는 두 노선이 있었다. 하위렴은 후자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부산을 거쳐 육로로 가는 것보다 곧바로 제주해협을 통과해 제물포로 항해하는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배는 한라산이 보이는 제주도를 지나 목포외항에 잠시 정박한 뒤, 서해 연안을 따라 제물포로 가는 배였다. 이 배는 화물을 취급하는 우편선으로 여행객을 태우기도 했는데 승객은 주로 조선으로 가는 일본인들이 대다수였다.

나가사키를 출항해 밤을 꼬박 새워 항해한 증기선은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오른 뒤에야 제물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조수 간만의 차가 너무도 커서 하선하지 못하고, 또다시 적당한 물때를 기다리며 4시간 이상을 바다에서 지루하게 보내야 했다. 거의 저녁쯤 되어 밀물이 들어오자 그제야 작은 배로 갈아타고 포구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제물포는 요코하마나 나가사키에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보잘것없었으나 선착장 주변에는 사람들이 제법 붐볐다. 개항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일본식 건물이 제법 눈에 띄었다. 포구 앞바다에 떠 있는 기선의 뱃고동 소리에 놀란 갈매기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선착장 주변을 한가롭게 맴돌고 있었다.

코트의 단추를 채우고 장갑을 끼고 있어도 한기가 들 만큼 포구의 바닷바람은 몹시 쌀쌀했는데도 화물을 내리는 부두 노동자들의 옷차림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선착장 출구 주변에는 오랫동안 씻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한 소년이 큰 소리로 호객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짐을 찾아 선착장을 빠져나올 때는 이미 짧은 겨울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난 뒤였다.

하위렴은 호객하는 소년의 뒤를 따라 일본인이 운영한다는 외국인 숙소를 찾았는데 입구에서부터 몸집이 왜소한 일본인 주인이 나와 한양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서툰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인력거를 불러 타는 방법과 뱃길로 가는 방법이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해도 내일 아침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하위렴은 인력거를 탈까도 생각했으나 짐이 많아, 일단 마포까지 간다는 뱃길을 택하기로 하고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은 조선 시대 초기부터 삼남 지방에서 세곡이 올라오는 물류의 통로로 선박 출입을 관리하는 관리가 양화진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불란서 군함이 한강을 따라 침입한 이후로는 관리들 대신에 병사들로 교체했다가 아예 어영청 의 군사 훈련장까지도 이 근처로 옮기면서 군대를 주둔시켰다. 갑오개혁 이후로는 장어영壯禦營 소관의 관선이 제물포에서 양화진과 마포 구간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며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지낸 하위렴은 이튿날 아침 다시 배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해 차가운 강바람을 내내 거스르며 양화진을 지나 마포나루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한참 지나서였다. 나루터에 내려서 바라본 눈 덮인 한강 변의 풍경은 스산한 겨울의 모습이었으나 더 할 수 없이 평화스러웠다. 먼저 하위렴은 배에서 짐을 끌어 내리고 도성으로 데려다줄 짐꾼과 안내인을 서둘러 찾아야 했다.

개화기 당시 서울의 지도
개화기 당시 서울의 지도(양화진과 마포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려져 있다)
인력거꾼을 구한 하위렴은 짐들을 두 대에 나눠 싣고 그들을 재촉해 도성으로 향했다. 나루터에서 좁은 길을 따라 도성으로 이동하는 연도沿道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띄엄띄엄 보이는 초가집 사이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살얼음이 깔려있어 미끄러웠다. 몇 개의 언덕을 뒤로하면서 3마일 정도를 지나 제법 큰길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통행이 잦아지고 있었다.

도성이 가까워지자 큰길 양편으로는 규모가 작은 가게들이 연이어 저잣거리를 이루고 있었고 가게의 담벼락이나 기둥에 걸어놓은 상품이라곤 수공예품과 조악한 면직물들이 전부였다. 하위렴의 인력거가 가게 앞을 지날 때는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거칠어진 인력거꾼의 어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문(서소문?)을 지나 선교부에 이른 것은 이미 짧은 해가 지고 어스름이 밀려드는 무렵이었다. 서소문에 머물던 내한 선교사들은 엄동설한의 추위를 뚫고 혼자서 선교부를 찾아온 하위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뜨거운 환영으로 그를 맞았다.

조선시대 서소문
조선시대 서소문
집을 떠나 1개월이 넘는 여행 끝에 서소문에 도착한 그 날은 1896년 2월 19일이었다. 긴 여행의 여독도 있었지만, 조선까지 오는 긴 여정을 혼자 하며 긴장한 탓에 심신은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북장로교 선교부와 의료선교 협력

영은문 자리의 독립문과 모화관
영은문 자리의 독립문과 모화관
하위렴의 내한 소식은 조선 주재 선교사들에게도 금세 알려졌다. 마침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독립문 근처 모화관慕華館에 진료소를 차려놓고 아내 와 함께 진료도 하며 복음을 전하던 중에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의료선교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더우드는 곧바로 서소문 남장로교 선교사 숙소를 찾아와 하위렴에게 대뜸 모화관 사역의 동참을 제안했다. 이미 예양협정으로 각국 선교부의 선교지역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전혀 영문을 모르던 하위렴은 언더우드의 간곡한 협력 요청에 비록 잠깐이었지만 북장로교 의료 사역을 돕기도 했다.

호남선교를 시작하다

1892년 내한한 7인의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 뒤를 따라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은 언어를 충분히 익힌다거나 선교지에 적응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부 설치에 분주했던 개척선교사들의 일정에 맞추어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초기선교 활동은 실제로 개척선교사들과 동일한 시점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위렴보다 한해 먼저 내한한 유진 벨의 사정은 조금 나았으나 하위렴은 내한한 지 겨우 6개월 만에 곧바로 전주로 배치가 되면서도 그들과 같은 템포로 활동해야 했다.

선교지를 전남지역까지 확대하다

7인의 개척선교사가 내한 한 그 이듬해(1893) 먼저 온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장로교선교공의회'를 조직하고, 선교지 분할의 원칙적인 사항들을 논의하면서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s을 맺을 때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은 일찌감치 남장로교에 맡겨졌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지부 설치 계획을 세우고 한 조에 두 사람씩 편성해 군산에는 레이놀즈와 드루를 그리고 전주에는 전킨과 테이트를 보내 탐사를 마쳤던 터라, 아직 돌아보지 않은 전남지역까지 선교지역을 확대하기 위해 1896년 가을 벨과 하위렴에게 후보지 탐사를 맡겼다.

말을 타고 탐사 여행을 떠나는 해리슨(좌)과 벨(우)
말을 타고 탐사 여행을 떠나는 해리슨(좌)과 벨(우)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전, 테이트 선교사에 의해 이미 마련된 전주지부를 교두보로 삼아, 1896년 9월 한 달 동안 하위렴과 벨은 전남 일대를 돌면서 후보지를 물색했다. 그해 11월에도 두 사람이 재차 탐사하며 내린 결론은 일단 전남지방의 행정중심지인 나주를 지부의 후보지로 물망에 올린다는 거였다.

이듬해인 1897년 3월, 나주에 부지를 매입했으나, 전혀 예상치 않았던 지역유림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나주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일부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선교사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이르자 선교부에서는 부지 매입을 취소하고 결국 나주지부 설치 계획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마침 목포가 개항장으로 선정되었다는 발표가 나자 지부의 후보지를 목포로 바꾸면서 유진 벨은 목포에다 지부를 세우게 된다.

"1897년 3월 봄, 배유지와 하위렴 두 목사는 나주에 가서 성내에 숙소로 쓸 초가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고 (중략) 성밖에는 장차 선교지로 사용할 땅을 매입한 후, 전도를 시작하였다. 양반 골인 나주는 외국인과 예수교에 대한 태도가 적대적이었다. 청년들은 작당하여 돌을 던졌으며 선교사를 성 밖으로 축출하려고 하였고, 주민들은 선교사들이 성내에 거주할 경우 살해하겠노라고 거듭 위협하였다. 이리하여 배유지 목사와 하위렴 목사는 부득이 매수하였던 토지와 가옥을 환매하고 다른 곳으로 선교지를 개설할 수밖에 없었다."

백종근 목사는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
한국에서 한양대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하고,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교회 역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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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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