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교수(에스더기도운동 대표)가 지난 20일 토요청년지성소예배에서 ‘나 같은 자가 어찌’(느헤미야 6:11)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교수는 “느헤미야 6장을 보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건축공사가 거의 다 끝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성벽을 재건하면서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느헤미야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를 헤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안 속어 넘어갔으며 자기가 있는 자리에 이탈하지 않았다”며 “본문을 보면서 마지막 사단의 발악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여기서 이들은 느헤미야를 불러내서 헤치려고 했는데 느헤미야는 속지 않았다. 제사장인 스마야가 느헤미야를 찾아가서 자신을 심방하도록 유도 했으며 산발랏과 게셈이 그를 밤에 죽이려고 한다고 경고했으며 성소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여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라고 했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율법을 보면 성소에 머무르고 잘 수 있는 것은 제사장과 거기에 헌신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성소에 접근하면 안 됐다. 거룩이라는 말은 깨끗함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구분되었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구분된다는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재능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구별되어 있을 때 그게 은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술담배를 하지 않고 이성 관계에서 깨끗하고 그런 것을 넘어서서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르심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하면 내 삶이 거룩하게 쓰임받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예레미야는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여’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영적 지도자라고 해서 다 들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성경, 신적인 권위가 있다. 그래서 누가 얘기를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언급이 안 되어 있다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락을 가지고 분별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거기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영적 지도자의 말을 사역의 범위 안에서는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태어났고 포로로 끌려간 자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디아스포라로 살았지만, 토라, 탈무드 등을 교육받았기에 율법을 꿰차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언에 대한 말씀을 쭉 설명하는데 제일 마지막을 보면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라고 되어있다”며 “우리가 듣는 설교 말씀, 또 우리가 상담할 때 받은 말 등을 다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로서 원칙이 분명했다. 그는 죽음의 위기,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원칙을 붙들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주기철 목사님을 보면 그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 온갖 환난, 핍박이 몰려와도 주 목사님은 죽기를 작정하시면서 타협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사역에 빠져들면서 사역을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것만 넘어가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럴 때 타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역과 비전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라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란다”며 “우리가 주님의 사역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중심에 무엇을 우선으로 두고 가는지가 중요하다. 항상 우선을 하나님으로 두고 가시길 바란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생을 바라보고 산다. 사탄의 특징은 죄짓게 하면 그거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율법을 잘 알았으므로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고 결국 느헤미야는 이것이 그들의 소행임을 알게 되었다. 14절에서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다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드르이 소행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다”며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붙잡고 가야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다. 이 성경 말씀대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싸움일 수 있다는 것을, 성경 말씀을 끝까지 지키면서 내 생명보다 말씀의 원칙을 더 중요하게 할 것이냐가 느헤미야의 마지막 테스트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면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은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결국 목매어 죽었다. 그는 마귀가 준 마음으로 인해 마귀의 일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결국 생을 비참하게 마감하게 되었다”며 “저는 캥거루족같이 살던 한 청년의 간증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직장에 취직하지 못했고 병이 있었으며 그래서 늘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마귀가 그 청년에게 독한 마음을 주면서 부모님을 존속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님 시신을 매장하는데 그때 계속 마귀가 참소하며 회개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청년의 간증처럼 마귀는 계속 죄짓게 하고 회개하지 못하게 하고 끊임없이 참소한다. 마귀는 죄짓고 나면 그것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끌고 간다. 그러므로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내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매장이 되더라도 죄는 반드시 대물림되지 않도록 끊어내야 한다”며 “사단은 참소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망신을 당할지라도 내가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다고 그렇게 정리될 때까지 죄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죄의 크기에 상관없이 죄는 결국 사망을 부른다. 그러므로 사역할 때 반드시 죄의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고 넘어가시길 바란다. 고린도전서 14장 29절을 보면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을 분별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하시길 바란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힘써야 한다. 하지만 실수할 수 있고, 어떤때는 내 욕심이 내 주님의 음성처럼 그렇게 착각해서 들릴 때도 있다”고 했다.
이어 “그러므로 분별력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받은 것들을 분별하고 나서 확신하면 나에게 이런 감동이 되었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조심해야 하며 자칫하면 교만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결혼 문제 관련해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며 “우리의 바람, 욕심이 주님의 음성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분별해야 하며 신앙 있는 경험자들에게 분별력이 있는 지도자에게 분별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마귀가 여러분 인생에 역사하지 않고 안전하게 가는 길이다”고 했다.
끝으로 이 교수는 “젋은 청년들은 이성 문제로 인해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분별력이 필요한데 나에게 분별력이 없다면 지도자들을 통해 잘 분별하고 인생에서 허비 없이 세월을 아끼며 최선의 길을 나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