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의 여정의 시작점은 우리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곳에서 자신을 비우게 될 때 시작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빈 그릇 가운데 그분의 영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 21절에서는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즉 우리는 “당신의 영으로 저를 충만하게 채워주옵소서!” 라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데, 우리가 충만히 채움 받으려면 빈 그릇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내 심령의 보좌에 다른 주인이 있으면 성령님은 충만히 역사할 수 없다. 내 안에 육신의 모습이 있으면 성령님은 충만히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성령 충만을 간절히 구했지만 얻지 못함은 내 마음속에 성령 충만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충만히 임하지 않은 것이다.
내 심령의 보좌에 다른 주인이 있으면 그 주인이 성령님을 거스르고 성령님을 훼방하는데 어찌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는 분명히 말씀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도는 성령님께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막는 하나의 큰 세력은 바로 육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가 곧 범인이다.
죄의 능력을 정복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도 믿음이 부족하거나, 사단의 힘 때문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죄란 육체가 성령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이 성령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우리의 정서는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성령 충만함의 상태를 착각하곤 한다. 은사를 받았거나 교회 활동에 열심이라고 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인 모습에 집중하다 보면 진정한 영적 성장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마치 나무의 가지만 다듬고 있을 뿐, 뿌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차원에만 머무르면 안된다. 본성의 뿌리는 건들지 않고 가지만 치고 있거나 죄가 속해지기만을 바라니 어찌 쓴뿌리에서 좋은 열매가 나겠는가? 주님은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지 좋은 가지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성도는 회개의 차원을 지나서 자기 부인의 과정으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자아는 훨씬 더 깊고 교묘하게 우리 안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죄를 대속함에 관한 계시일 뿐 아니라 육체에 뿌리 박은 죄의 실제적인 지배는 십자가 자기부인을 통해 벗어나는 능력에 대한 계시이기도 하다. 앤드류 머레이는 ‘십자가는 육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시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 충만의 핵심은 우리의 육신적 본성을 깊이 인정하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있다. 우리의 옛 자아,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 욕망,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선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까지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주저하게 된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자신의 무능함과 부족함을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자기 부인으로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될 때 성령 충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할 때, 비로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법적으로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도 죽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십자가는 육의 삶을 끝내고 영의 삶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십자가는 성령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다. 성도가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부인을 통한 세례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매일, 매 순간 지속되어야 하는 여정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때, 성령님께서는 점점 더 깊이 우리 삶을 채우시고 인도하신다. 이는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리가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더욱 강하게 흘러들어오는 것과 같다. 성령 충만한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가장 자유롭고 풍성한 삶의 길이기도 하다.
성령 충만한 삶은 마치 성령의 전을 세워가는 여정과 같다. 성전부지를 청소하듯이 세속적인 생각을 비워야 하며 회개와 겸손의 고백으로 기초 공사를 하고 말씀으로 골조를 세우며 자아 내려놓기로 성령님 보좌를 마련하고 믿음의 고백과 선포로 벽을 쌓고 찬양과 경배로 성전봉헌을 하며 계속적인 기도와 말씀 묵상, 순종으로 성전을 유지, 보수해야 한다.
이러한 삶은 눈에 보이는 열매로 나타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우리 삶 가운데 맺히기 시작한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흘러넘치게 되며,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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