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도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백종근 목사의 저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189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어 전주와 군산 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평생을 보내며 이 지역의 유무형의 선교 인프라를 깔아 호남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그 내용을 수회에 나누어 본지에 싣는다.

제 1 장 하위렴(William B. Harrison)의 고향 켄터키

서부로 가는 관문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에는 주로 동부 해안가에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 1750년에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라는 영국인 의사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가는 고갯길을 발견했는데 얼마 후에 탐험가 다니엘 분(Daniel Boone)이 사람들을 이끌고 협곡을 넘어와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정착하면서 이 땅을 켄터키로 불렀다. 이때부터 켄터키는 서부로 가는 관문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이 독립을 외치며 영국과 전쟁을 벌이자, 켄터키를 잃었던 인디언들은 마침내 백인들을 쫓아낼 기회로 여기고 정착민들을 배후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니엘 분Daniel Boone의 딸을 포함한 몇몇 정착자들이 인디언에게 납치되었던 사건도 이 무렵의 일로, 이때 인디언들을 쫓아가 붙잡힌 사람들을 모두 구출했다는 다니엘 분의 이야기는 서부 개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이 되어 오랫동안 회자가 되었으며, 그의 무용담은 후에 <모히칸족의 최후>라는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과 켄터키

토착 인디언들을 밀어내고 켄터키에 정착한 백인들은 비옥한 이 땅에 아프리카에서 헐값에 팔려온 흑인 노예들을 끌어다 대규모로 담배와 목화를 경작해 엄청난 호황을 누렸으나, 반면에 노예들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그리운 저 켄터키 옛집 위하여
머나먼 길 노래를 부르네

지금은 미국의 민요로 흥겹게 불리는 노래지만, 알고 보면 흑인 노예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을 떠나 낯모르는 곳으로 팔려 갈 때, 혈육과 헤어지며 눈물로 부르던 가슴 아픈 이별가였다.

민요에서처럼 켄터키는 노예주였다. 켄터키와 오하이오를 남북으로 나누는 오하이오 강이 미국을 지역적으로 가르는 경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오하이오는 자유주임을 내세웠고, 켄터키는 노예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정작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켄터키는 노예제를 옹호하면서도 북부와도 손을 잡고 중립지대로 남고자 했다.

이를 지켜보며 못마땅해하던 남군이 그해 여름 켄터키주의 서부를 공격하며 응징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북부에서도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와 순식간에 퍼듀카(Puducah)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주 정부는 자신들이 주를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스스로 군대를 만들어 남군과 대치하면서 주민들의 정서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북부의 편에 섰다.

이처럼 켄터키는 접경지대라는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남북 어느 쪽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켄터키는 남북전쟁 내내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1862년 1월 북군은 밀 스프링스(Mill Springs)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8월에는 리치먼드(Richmond) 전투에서는 남군이 이겼으나, 곧이어 10월에 있었던 북군의 부엘(Don C. Buell) 장군과 남군의 브래그(Braxton Bragg) 장군이 이끄는 페리빌(Perryville) 전투는 남북전쟁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로 양쪽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남군의 패배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켄터키 주민들의 민심은 주 정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여전히 남부에 강한 동정심을 보였다. 왜냐하면, 북부의 손을 들어준 주 정부에서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고 노예들을 해방하자 주민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입은 엄청난 손실로 말미암아 그들 스스로가 전쟁에서 패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

노예제의 폐지로 일순간에 대농장의 지주들이 몰락하면서 남부의 경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북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구조조정으로 미국의 산업이 급격하게 재편되면서 서부로 향한 철도가 놓이자 오하이오 강을 따라 형성되어 왔던 물류 산업들은 순식간에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잇달아 남부의 젖줄, 미시시피강의 뱃길을 따라 교역을 하던 강변의 작은 항구들마저 속속 몰락하면서 대부분의 남부의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켄터키 경제 역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몰락한 켄터키의 농장주들은 자구책을 강구했다. 1870년대부터 서부 진출을 위한 말의 수요가 급증하는 점에 착안하고, 담배와 목화 대신 초지를 일궈 말을 사육하면서 켄터키를 점차 종마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해 활로를 뚫는 한편 사양길로 접어든 담배 대신 옥수수를 재배하고, 다시 옥수수를 발효시킨 위스키를 빚어내 켄터키를 위스키의 고장으로 만들어 갔다. '버번 위스키'(Bourbon Whisky)로 불리는 켄터키산 위스키는 이렇게 탄생했으며 호밀을 원료로 한 '스카치 위스키'를 대신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출생과 성장

하위렴(William B. Harrison)은 남북전쟁의 포화가 멈추고 그 이듬해인 1866년 9월 13일 켄터키주 레바논(Lebanon, KY)에서 태어났다. 켄터키는 그의 증조부가 버지니아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이래 그의 가족사의 주 무대가 된다.

그의 조부 윌리엄 해리슨(William Burr Harrison)이 20세 나이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안타깝게도 결혼 5년 만에 아내가 죽고 말았다. 얼마 후 그의 조부는 깁스(Elizabeth Gibbs)라는 아가씨와 재혼해서 아들 하나를 더 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재혼한 아내와 핏덩이 아들을 남겨둔 채 자신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 조부가 후처 깁스(Elizabeth Gibbs)에게서 얻은 그 아들이 바로 하위렴의 아버지 찰스(Charles B. Harrison)였다. 살길이 막막했던 깁스는 얼마 후 어린 찰스를 데리고 재혼하게 된다. 하위렴의 조모 깁스와 재혼한 남편 사이에는 자식이 없이 찰스(Charles B. Harrison)만 외아들로 키웠다.

찰스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생부의 농장에다 자식이 없이 사망한 계부의 농장까지 물려받으며 전형적인 농장주로 자리를 잡으면서 28살이 되던 1858년 8살 연하의 아가씨 엘리사(Eliza Lisle)와 결혼해, 그녀와의 사이에 6남매를 낳았다. 하위렴은 그중 셋째로 위에 누이와 형이 하나씩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이 더 있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켄터키주 여느 농장주들과 마찬가지로 찰스(Charles B. Harrison) 역시 담배를 경작해 짭짤한 호황을 누렸으나 앞에서도 언급했듯 노예 해방령이 내려지면서 그의 담배농장도 예외 없이 급속히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남부의 노예들은 해방이 되자 자유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다는 기대로 크게 반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하루아침에 농장주로부터 독립해 자신이 살던 농장을 떠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말만 자유 신분이 되었지, 생계가 여의치 않은 흑인들은 그대로 주인집에 눌러앉아 하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이유로 찰스는 여전히 집안에 흑인 노예들을 하인으로 거느리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870년 연방 인구조사 기록에서 보이듯 가사를 돌보는 사십 대 중반의 흑인 여자 마리아(Maria)와 농장에서 일하는 루이스(Lewis)라고 불리던 오십 대 초반의 남정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찰스의 동거인으로 등록이 되어있다.

이렇듯 남북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하위렴은 흑인 하인들이 가족들의 시중을 들거나 누나와 형을 마차에 태워 읍내 학교까지 통학시키는 것을 보며 자랐다. 레바논 읍내를 포함한 마리온 카운티(Marrion County)의 농장주들의 자녀들은 거의 흑인 하인들이 모는 마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
1870 United States Federal Census, Kentucky Marion Lebanon

하위렴 역시 읍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읍내 주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남북전쟁의 치열한 격전지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마을의 숲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도 당시 전투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숲속에서 가끔 병사들의 색바랜 견장이나 녹슨 칼 혹은 부러진 총자루 같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 가방 깊숙이 넣어 학교에 가져와 또래의 아이들 앞에 펼쳐놓고 마치 자기들이 전투에 참여한 군인이나 된 것처럼 으쓱거리며 신나게 떠들어 대기도 했는데, 남부군과 북부군들의 용맹성을 비교하는데 이르면 그들은 으레 편이 갈려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모 교회 레바논 장로교회

초기 개척자들이 켄터키로 들어와 정착한 시기가 1773년 무렵이었고, 미국 독립(1776)을 전후해 켄터키로의 본격적인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본다면, 1789년에 세워진 레바논 장로교회는 레바논에 자리를 잡은 초기 정착민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임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
2014년 레바논 장로교회 교인인 카티나 존슨(Katina Johnson)은 교회의 역사를 회고하며 수채화 한 점을 그렸는데, 화폭 안에 통나무로 지은 캐빈 교회(Cabin Church)를 현재의 교회 옆에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225년(1789~2014) 교회 역사를 돌아보게 했다.

그 후 처음 세웠던 통나무 교회를 헐고 그 자리에 목조건물로 몇 차례 개축을 거듭하다가 바로 그 옆자리에 지금의 석조건물을 다시 신축했다.

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
현재의 레바논 장로교회 모습

켄터키에 자리 잡은 하위렴의 집안은 스코틀랜드인 후예답게 그의 선대 조부터 대대로 장로교 집안이었다. 하위렴의 조부(William Burr Harrison)로부터 시작해 아버지(Charles Butler Harrison)로, 다시 하위렴 자신에 이르기까지 자녀들은 경건한 장로교의 전통 속에서 자랐으며, 주일이 되면 앞에서 언급한 읍내에 있는 레바논 장로교회에 온 가족이 함께 출석했다. 레바논 장로교회는 하위렴의 가족과 삶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신앙과 교육의 공동체였다.

백종근 목사는

백종근 목사
백종근 목사

한국에서 한양대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하고,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교회 역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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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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