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율법’은 ‘은혜’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처럼 여겨지기 일쑤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즐겨 선포되는 본문도 아니다. 일반 신자들이 성서를 읽을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본문이기도 하다. 어렵고, 난해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과 전혀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이상하게까지 보이는 것이 율법이다.
성서학자인 민경구 교수(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구약학)는 율법에 대한 이러한 오해들에 단호히 ‘아니다!’라고 답하며, 율법이 인권에 관심을 기울일 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다.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을 사랑하라는 인권 존중의 명령임을 밝히고, 한국 교회에 만연한 율법에 대한 망각이 곧 성서가 옹호하는 인권에 대한 망각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율법의 정신을 올바르게 받들어 지킬 것을 설파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창세기 1:26-28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고대의 개념과 비교한다면 창세기 1장은 왕정 이데올로기를 상대화시킨다. 신의 형상은 왕에게 국한되지 않고, 확대되어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신 앞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등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서술은 모든 인간이 신 앞에 동등하다는 ‘만민평등사상’을 보여 준다. 이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 권리’ 곧 인권이 평등하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원역사가 제시하는 인간 이해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어 “‘게르’를 언급하는 다소 낯선 문맥은 소위 성결법전(레 17-26장)이라 불리는 레위기 25:23에서 관찰된다. 여기에서 가나안 땅에 거주할 이스라엘이 ‘게르’로 기록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주목된다.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게르’로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레위기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았던 삶을 ‘게르’로 정의하며, 토지 소유권을 하나님께로 귀속시킨다. 토지 소유권이 없는 그들은 그것을 매매할 수 없었고, 다만 경작권을 가졌을 뿐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땅에 오랜 기간 거주했던 ‘나그네’와 이스라엘인 사이에 궁극적인 차별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출애굽기 23:4-5은 신명기 22:1-4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형제’의 가축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수’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3:4이 가리키는 ‘원수’(오예브)는 누구인가? 이 용어는 심지어 적군을 포함할 정도로 다양한 범주에서 해석된다(신 28:25). 하지만 우리는 출애굽기 23장이 재판이라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즉, 이곳의 ‘원수’는 일차적으로 법적 소송 관계에 있는 혹은 있었던 상대자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신명기가 태형의 한계를 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죄를 범한 자가 겁에 질려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로 생명을 구걸하는 것을 방지하며, 심한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죄인은 40대 태형까지는 견디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태형은 가하지 않도록 정함으로써, 신명기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존엄’이 보호되어야 함을 명시한다. 이것은 형제 윤리를 근간으로 하는데, 여기에서 죄인은 ‘네 형제’(아히카)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신 25:3). 즉, 그가 비록 죄인으로 형벌을 받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형제’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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