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9)
구약성경에는 외워서 묵상하기 쉽도록 동일한 범주의 단어들을 대칭 또는 반복하는 수사법이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대조법이 조금 이상합니다. “악인의 제사”의 반대는 “의인의 제사”여야 합니다. 만약 이런 비교가 너무 무미건조 하다면 최소한 동일한 의미의 다른 단어를 사용했어야 합니다. 예컨대 “선을 행하는 자(의인)의 예배(제사)”라고 대조시켰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인 대신에 “정작한 자”를, 또 제사 대신에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물론 의인은 당연히 정직해야 하고 또 제사에 기도가 큰 몫을 합니다. 그러나 정직은 의인이 갖는 특성의 일부이듯이, 기도도 제사의 일부 순서이지 그 전부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악인의 제사에 비해서 정직한 자의 기도가 함의하는 범위가 좁기에 정확한 대칭적 비교가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대조했다면 반드시 그렇게 했어야만 할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한마디로 악인의 반대가 정직한 자라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는 자가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배와 기도와 연결해서 이 두 특성을 비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란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선 정직은 의인의 품성의 일부 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정직이야말로 의인 됨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자신에게 정직한 자가 의인이요, 그렇지 못한 자가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는 악인은 제사를 즐겨 드리고, 정직한 의인은 기도를 자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정직하지 않는 제사를 드리는 자가 악인이며, 정직한 기도를 드리는 자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나누는 기준이 세상에서 얼마나 선과 악을 행하느냐에 두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잘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도 아닙니다. 본문에 따르면 분명 악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마 이웃에게 선도 행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께 정직하지 않는 동기로 제사를 드리러 나온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또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는 것과 대조되려면 그런 제사는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럼 정직하지 않는 제사란 어떤 것입니까? 제물이나 헌금을 속이는 것입니까? 그는 정직의 문제를 넘어서 이미 죄입니다. 그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인생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그러하고 그분은 단지 가장 큰 능력을 지닌 종으로 부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안락과 형통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드리는 만큼 비례해서 현실의 복을 받으리라는 기대로 제사하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수단에 의지해 이 땅의 삶만 풍요롭게 만들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에 반해 정직한 자의 기도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검소하게 보이려고 자기가 은혜 받기를 소원하는 양을 일부러 줄이지 말라는 뜻입니까? 세상에서의 일신상 형통과 안일이 진짜 목적이면서 겉으로는 신령하고 거룩한 일인 것처럼 위장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일도 분명 정직하지 못한 것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거짓말이라는 죄를 이미 범했기에 악인의 제사에 해당됩니다.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감히 속일 생각을 했다니 너무나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믿음이 순전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거룩하신 품성을 절대로 확신하기에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응답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응답이 비록 자신의 기대한 때와 달리 한 없이 순연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응답되어서 미처 응답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해도, 그분의 인도는 절대적으로 나에게 유익하며 또 당신의 영광도 드러내리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하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것도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나를 끊어낼 수 없음을 알기에 어떤 고통스럽고 곤란하고 억울한 처지에서도 그분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과 감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좁고 협착한 길을 곤비하게 걸어가며 머리 둘 곳마저 없어도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기꺼이 기뻐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얼마나 검소하고 거룩한 일인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속이려 들 수는 결코 없습니다. 신자로선 자기 필요와 소원을 어떤 위선과 과장과 가장 없이 정직하게 아뢰면 됩니다. 비록 자신의 정욕이나 죄성이 포함되었을지라도 미처 알지 못했다 해도 있는 그대로 기도하면 성령님께 나중에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정작 주님과의 관계에서 정직이란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해도 정말로 그분은 미쁘신 분이므로 그분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믿음의 자세가 하나님의 기쁨에 합당하도록 순전한 것이 바로 신자의 정직인 것입니다. 또 그런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현실적 복만 받으려는 목적으로는 아무리 제사를 자주 드리고 기도를 뜨겁게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 성경은 그런 자를 불신자도 아니고 악인이라고 칭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어지간한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지당한 말씀을 드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기복적 동기가 아닌 기도를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순전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실 뿐 아니라 부정직한 믿음이 됩니다. 말하자면 순간적 일시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엔 악인의 자리에까지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권세를 이미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울부짖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이미 받은 줄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 산을 명하여 저리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기도의 권능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한 자의 기도여야만 유효한 것입니다.
요컨대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 그 심령이 순수하고 정직해지는 반면에 종교에 열중하는 자는 교회의 행사와 형식에 치중하려 합니다. 문제는 참 신앙을 가진 자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순전하고 정직한 기도를 할 수 있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2011/9/2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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