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무대는 다시 초막절이다. 초막절에는 물 축제와 불 축제가 있다고 했다. 초막절 첫날 저녁에 제사장들이 여인의 뜰에 있는 4개의 금촛대에 불을 켠다. 탈무드에 의하면 촛대 높이가 50큐빗(25m),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의 높이다. 그렇게 높은 이유는 온 예루살렘 시내를 다 비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그 빛에 비추어 밀을 체질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빛은 꽤 밝은 편이었다.
절기 마지막 날 예루살렘의 거리를 훤히 비출 정도로 밝게 비추던 촛불이 명절이 끝나면서 더 이상 빛을 내지 않게 된 때, 아침에 태양이 막 떠오르고 있을 즈음으로 추정되는 바로 그때(2절) 횃불을 들고 행진하던 초막절 마지막 날 횃불 축제(lamp festival)를 배경으로 예수께서 자신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물 축제를 배경으로 자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라고 하신 것과 비슷하다. 성전에서의 다섯 번째 대화(Dialog) 부분이다.
예수님의 두 번째 “I am…” saying
예수님의 첫 번째 “I am…” saying은 “나는 생명의 떡”(요6:35)이라는 말씀이었다. 요한복음에 7개의 “I am…” sayings가 나온다. 모두 다 ‘주어(S)+동사(V)+보어(C)’ 형태인데 오늘은 두 번째, ‘떡’도 ‘빛’도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에 절대 필수, ‘생명’(生命)과 관련이 있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첫날에 가장 먼저 만드신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만일 빛이 없다면 생태계의 존속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빛’은 하나님의 ‘구원(救援)과 계시(啓示)의 상징’이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6장)과 ‘생수’(7장)에 이어 ‘세상의 빛’이라는 장엄한 “I am” 선언으로 또다시 자신이 생명의 근원, 인생의 절대 필수인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셨다. 요한은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연상케 하는 ‘생명의 떡’과 ‘생수’에 이어 불기둥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세상의 빛’이라는 광야에서의 이미지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천명한다.
세상의 빛
이 선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시온 산 가장 높은 곳에서 어둠을 뚫고 비추고 있는 빛, 달만 뜨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던 밤길도 예쁜 밤이 되듯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라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 그래서 요한은 요일 1장 5절에서도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을 빛이라고 증거한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은 바로 이 어둠 가운데서 헤매던 사람이었다. 참 행복이나 바른길을 알지 못하고 욕망의 늪에 빠져 살다가 잡혀왔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 타인을 사랑과 이해의 시선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와 배제와 이용 가능한 한낱 도구 취급한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들 또한 죄의 사슬에 매여 허덕이고 있으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그들은 소경이었다.
어거스틴(Augustine)도 그랬다. 20세도 되기 전에 기생집을 출입하며 사생아를 낳았을 정도로 허랑방탕했고, 이방 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에 빠지기도 했지만 눈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했던 어머니 모니카(Monica)의 눈물의 기도로 그를 돌아온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정원에서의 명상 중에 “성경을 펴서 읽으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때 그가 펴서 읽은 성경이 로마서 13장 12절 이하의 말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말씀의 빛을 받자 어두움이 물러간다. 그 빛이 그를 다시 공부하게 했고, 결국 바울 사상을 후세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한 중세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가 되게 했다.
그렇다. 빛은 깨달음이나 지혜와 관련된다. 구약에서는 토라(תּוֹרָה)가 빛이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토라는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3). 예수께서 자신을 빛이라고 하신 것은 바른길로 이끄는 ‘지혜의 빛’이시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지혜의 빛’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이시기도 하다(12절). 빛은 ‘생명’과 직결된다. 생명을 주는 태양도 한낱 피조물이요 빛을 주관하는 존재일 뿐, 참 빛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27:1)라고 찬양했다. 생명과 관련된 빛이 비취면 생명이 꿈틀거리며 만물이 살아나듯 우리 영혼도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영이 살아나고 육체가 살아난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만 세상의 빛이 아니라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고 하신 것인데 물론 우리가 발광체라는 말은 아니다. 빛이 될 수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달빛 같은 존재, 예수님이 태양 같으시다면 우리는 달빛 같은 존재다. 같을 수는 없다. 달빛은 어둠을 비추고 안내하는 역할만 하지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달빛으로 농사 짓나? 아니다. 달빛으로 과일이 익나? 그것도 아니다. 반면에 태양빛은 농사를 짓게 하고 우리를 살려준다. 태양 빛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존재, 예수님께 집중하는 만큼 더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다. 기왕이면 한쪽 구석으로만 잠깐 비추다가 사라지는 초승달과 그믐달이나 반쪽만 비추다가 초저녁부터 밤 중쯤 비추다 사라지는 반달이 아니라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이 되어야 한다. 교회 와서 찬송 부를 때까지는 빛이 있는 것 같다가 나가면 꺼져버리는 초생달 신자나 어떻게 보면 신자 같다가 어떻게 보면 전혀 신자가 아닌 것 같은 반달 신자가 아니라 언제나 은혜가 충만한 보름달 신자, 이게 주님의 기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태양을 등지거나 지구의 그림자에 가리면 빛은 약해지고 만다. 또 참된 태양이 아니라 유사 태양에 현혹되어도 흔들리고 만다. 요한은 침례(세례) 요한마저도 빛이 아니라고 했다(1:8). 유사 빛을 조심해야 한다. 욕망 따라, 이념 따라, 어리석음에 따라 만든 유사 빛에 취하지 말고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내 판단은 참되다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바리새인들은 즉각 반발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13절), 유대인의 법에 피고는 법정에서 스스로 자기를 변호할 수는 없다는 규정이 있다며 증거의 유효성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스스로 증언했을지라도 자신의 증언은 참되다”며 그 이유를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초로 설명하신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4절),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일하고 계신다고 한다(16-18절).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는 답변, 그래서 모세의 법인 신17:6과 민35:30을 충족한다는 항변이다.
이 정도 되면 바리새인들도 ‘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일까?’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왔던 여인을 이용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고소하고자 했을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법도 제대로 몰랐고,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추한 모습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인에 대해서나 예수님에 대해서나 그저 자기식으로만 판단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의 법에 따라 정죄 대상이 분명했어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여인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녀를 구원하셨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영적 어두움 가운데 갇혀 있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19절), 수준이하의 구차한 질문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며 자신이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천명하신다.
요한은 그때 논쟁 장소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헌금함이 있는 곳이었다고 했다(20절). 산헤드린의 회의실이 가까운 곳이라는 뜻이다. 요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잡지 못했고, 그 이유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그저 제거할 생각뿐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어둠을 걷어줄 ‘참 빛’이셨고, ‘세상의 빛’이셨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답답하지 않나? 그런데 그들의 그 모습이 마치 우리의 모습 같다. 우리는 소크라테스(Socrates)를 죽인 것이 아테네의 민주정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총선이 다가오는데 국회의원 후보자들 중 재판이 진행 중인 후보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본다. 고소 고발도 너무 많다. 제도적 문제이자 토인비(Toynbee)가 말한 ‘지배적 소수’(dominant minority)의 타락이다. 늦은 판결이 안타까운데 예수님은 ‘육체에 따른 판단’(15절)을 지적하셨다.
지난 정권 때 우리나라 대통령이 UN 기후 총회에서 2030년까지 우리나라 탄소 감축 목표를 40%로 제시해서 큰 박수를 받고 원전은 축소하고 2050년엔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망할 수도 있는 엄청난 선언, 기업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선언이었다. 프랑스 장관의 말대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덧셈 뺄셈의 문제, 천문학적 비용도 대책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당시 어느 신문에서는 대통령의 어떻게든 남의 눈길을 끌려는 허영, 그 허영심이 덧셈 뺄셈 능력까지 마비시킨 것 같다고 했었다.
근래에 우리는 마치 등대가 무너진 시대를 사는 것 같다. 바람이나 파도의 문제가 아니라 등대가 견고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바다에는 항상 폭풍이 일고 파도가 치기에 등대는 그걸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판단을 잘해야 한다. 어떤 판단이 잘하는 판단인가?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는 거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셨다(16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자기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했다. 바울은 언제나 예수님을 본받아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되었다. 지금은 안개와 어둠이 너무 짙은 시대, 등대의 진가를 발휘해야 할 때다. 찬송가사처럼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 설레고, 어디 불빛 없는가고 찾는 무리가 많다. 험한 바닷물에 빠져 헤매는 사람들을 건져 내어 살려야 한다.
키엘케고르(S. Kierkegaard)의 ‘마차에 탄 부자’라는 예화에 보면 부자는 불 켜진 마차 안에 앉아 있고, 마부는 차가운 바깥바람을 쐬며 말을 몰고 있는데 부자는 불빛 아래 앉아 있기 때문에 바깥에 펼쳐진 하늘의 영광, 별들의 전경, 마부가 보는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한다. 과학이 피조 세계에 더 많은 빛을 비추고 있는 현대에는 그 빛으로 인해 오히려 보이지 않는 저편의 세계가 더더욱 흐려진 것 같다.
내 판단이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을 갖자는 말이 독단성에 빠지라는 말은 아니다. 목사나 교주들의 과대망상이나 착각, 노인네의 옹고집은 더 더욱 안 된다. 성경은 진짜 불과 가짜 불을 말한다. 하나님의 불과 다른 불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불인 진짜 불을 주시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준다. 그 다른 불에 현혹되면 실패하고 망할 것이다. 그래서 참 빛, 하나님의 빛을 비춰야 한다. 과학의 빛, 이성의 빛, 문화의 빛, 물질의 빛이 찬란하게 비치지만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빛이 아니면 세상은 밝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 정치가 벤쟈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범죄예방을 위해 어두운 골목길을 비취도록 아름답고 좋은 등 하나를 집 창문가에 달아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가로등에 효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두운 세상을 비취는 가로등처럼 쓰임 받아야 한다. 이사야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1-3)고 했다. 세상의 빛으로서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이다. 어느 교회 청년부 홈페이지에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네 글자로 무엇이라 하느냐?”라는 글이 올라왔다. 답은 ‘기립발광’(起立發光), 지금은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있는 때,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고 있는 때, 우리는 ‘기립발광’해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