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19-23)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온 것은 주의 성실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이 자기를 대할 때에 항상 성실하셨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정반대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과 실행을 오늘도 성실하게 올려드리겠다고 결심합니다. 주를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작정하고 실천에 옮기려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다음날 아침에는 그 결심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 반성하는데 시간을 다 보냅니다.
성실하다는 것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여일(如一)하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처음과 끝은 같을 수 있습니다.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 평생을 주님께 바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합니다. 마지막 천국 갈 때에도 주님의 이름만은 간절히 부릅니다.
그 중간 과정에선 주님 앞에 온전한 성실함을 보일 수 있는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분을 고의로 거역하여 그분 품에서 제 발로 도망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죄에서 완전해지지 못한 본성으로 인해 타락한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앞에 수시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평생을 두고 보면 술 취한 사람 같이 갈 지(之)자 걸음을 걸으며, 순간순간으로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상하좌우로 곤두박질합니다.
신자에게도 딱 한 가지 성실한 측면도 있습니다. 아침마다 회개한 후에 다시 결단하고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 아침마다 똑같이 회개와 결단을 되풀이하는 측면에서만은 그렇습니다. 신자의 성품과 삶과 인생은 우리 모두 인정하듯이 결코 성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주님의 성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아니 주님만이 온전히 성실하시기에 우리의 그런 너무나 불성실함의 성실한 모습마저 야단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렇게라도 하는 신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신자가 아침마다 회개하다 보면 주님의 성실하신 용서와 사랑에 힘입어 언젠가는 주님의 온전한 성실함까지 닮아갈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만약 성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제한적이지만 그분의 자비와 긍휼은 무궁합니다. 부족하지도 않고, 한계가 없기에 결코 마르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과 끝은 물론 중간 과정도 동일하게 성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침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주었기에 성실하다고 토로합니까?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밤새 자기가 죽지 않은 것,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살아있음에 감사한 것입니다.
살고 죽음이 하나님의 전적 주관에 달렸기에 피조물인 인간으로선 그분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인생은 사실상 매일매일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기에 새로운 하루만큼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어제 정말로 마땅히 진멸 당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이 그렇다면 평생으로 따지면 하루도 진멸당해 마땅하지 않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매일 매일의 삶 전체가 완전히 죄 중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죄와 아무 관계 없이 멀쩡했던 날이 단 하루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 중에 잉태하고 죄 중에서 살다가 죄 중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 죽어도 군말 할 수 없는데도 새로운 하루를 주시는 그분의 성실함은 너무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런 감사가 아침마다 우리에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침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제도 이런 저런 은혜로 채워주신 것만 감사합니다. 최소한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음에 감사합니다. 어제 있었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부터 가장 먼저 회상합니다. 자기가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습니다.
이 애가는 예루살렘성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 당한 직후에 저작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개인의 죄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을 철저히 회개하고 애통해 하는 내용입니다. 선지자는 그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통한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저희가 속한 공동체는 그런 심판을 받을만한 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제 내가 꼭 죽었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신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십자가 복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입니다. 매일 진멸당하지 않은 것만 감사한다면 계속해서 예수를 처음 믿었던 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꼴입니다.
매일 아침 죽어 마땅한데도 살려주신 것만 감사하기보다는 오늘이라는 새로 얻는 날에서 뭔가 앞으로 전진해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선지자의 회개도 마냥 그 자리에 머무르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이 기다림이 좋도다.”(26절) 선지자가 본문에 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요컨대 당신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주려고 오늘도 살려주었다는 뜻입니다. 새 날을 주었으니 우리더러 당신을 위해 어떤 큰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결심했다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다음날 아침에 성실하게 회개하고 다시 결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 타락하며 우상숭배의 죄까지 범해서 바벨론을 통해서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 백성을 대표하는 선지자도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3:1,18)라고 할 정도로 완전한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간구 중에 그가 깨달은 것은 나라가 망하고 군인들이 많이 죽고 왕을 비롯한 지도층과 숱한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는데도 완전히는 진멸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이스라엘은 백성과 나라 몽땅 진멸되었어야 그 지은 죄에 비추어 공평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아가 죄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징계의 형벌이 너무 엄격하고 과중하여 쓰라리긴 해도, 완전히 진멸하지 않고 일부를 살려두신 긍휼은 그 고통의 정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크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는 멸망했고 언제 회복될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런 낌새도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 외적 상황만 보고 판단하면 여전히 절망에 머물고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 시편을 작성한 시점이 나라가 멸망한 직후라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절망 가운데 가느다랗게 비춰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오늘도 내가 진멸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나라를 완전히 진멸치 않으셨던 그 긍휼이 오늘도 변함없는 크기와 감격으로 선지자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언제인지 몰라도 반드시 포로 생활에서 귀환시킬 것이며 나라도 회복시킬 것임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자기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그분의 선하심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선지자가 깨달은 진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어떤 죄를 아무리 반복해서 지어도 당신의 긍휼에서만은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나타나는 나라 멸망, 포로생활, 포로귀환, 나라 회복 같은 그분의 모든 역사도 바로 그 긍휼 때문에 그분의 때와 방식에 따라 그분이 성실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신자더러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라는 까닭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 2의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 기회를 얻게 되면, 아니 그 기회를 간구할 때부터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전에 실패했던 전철을 절대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전히 죄에서 벗어나 그분의 자녀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그분 또한 우리를 향해 성실하게 기다려 주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이 죄를 짓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해지길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고 징계로 환난을 겪었어도 오로지 그분의 구원만 기다립니다. 고통에서의 조속한 탈출만 바라지 그 구출이 우리에게 주는 제2의 기회라고는 생각지 못합니다. 구출 받고는 곧바로 세상과 다시 짝하여 죄를 짓다가 또 다시 징계 받습니다. 징계에서 구원 받은 후에도 신자의 불성실의 성실함이 동일하게 되풀이 됩니다. 사사기의 기록이 바로 그 내용이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헌신의 고백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아침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가 분명해집니다. 오늘도 이 것 저 것 행해 달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오늘 주를 위해서 이런 저런 일을 행할 테니까 도와달라고 해야 합니까? 물론 둘 다 좋은 일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행해야 고백은 저를 진멸하지 않고 오늘이라는 제 2의 기회를 주신 주님의 성실하신 긍휼을 진정으로 새롭게 여기며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로 그치지 말고 그 기회를 반드시 신자답게 살아감으로써 헛되게 낭비해선 결코 안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통회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는 수준까지는 안 되어도, 최소한 오늘만큼은 이전처럼 이런 저런 죄를 짓지 않겠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과연 아침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2015/2/10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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