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은 끝났다. 그런데 성경에서 당신의 기도장소로 자주 언급되는, 예루살렘이 한눈에 보이는 감람산으로 나가셨던 예수님은 또 다시 성전에 앉아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소문이 급속히 퍼져나가자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 책 잡아 죽이려고 궤계를 꾸민다. 밤새 잠복근무했을까? 간음하는 여인을 급습해서 현장에서 잡았다. 흥분한 종교지도자들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그녀를 끌고 왔던 모양이다. “이런 여자는 죽여야 돼” “말세다 말세” “원래 쟤는 학교 다닐 때부터 끼가 있었어” 사람들도 돌을 들고 모여들었다. 다짜고짜 바리새인들이 이런 여자를 어떻게 할 거냐고 예수님께 묻는다. 몰라서 묻는 것도, 배우려고 묻는 것도 아니다. 알면서 괴롭히려고 묻는 것, 그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딱 세 마디 말씀이었지만 진한 감동을 주는 말씀이다.
이 사건은 초기 헬라어 사본들 중 한 곳에만 들어있을 뿐 다른 데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기 사본들에도 각각 위치를 달리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다수의 학자들은 문체나 내용이 요한복음서에는 부합하지 않고 문맥도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며 요한복음보다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조나 행동에 더 잘 부합한다고 한다. 개역개정판에 괄호 처리되어 있기는 하나 메시지가 주는 감동이 큰 본문,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 더 집중해야 하겠다.
그 여인만 죄인인가?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라면 오늘날 회교권에서도 용서가 안 되는 여인인데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관련 율법을 파기하셨다. 어느 시대든 전통이나 윤리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예민한 문제, 상당한 반발이 있을 수 있고, 파장이 클 수도 있다.
더욱이 예수님은 그동안 사사건건 유대 지도층과 충돌했었다. 안식일법, 정결법, 성전 문제 등. 그런데 지금은 윤리 문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한 여자를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았다며 데리고 왔다. 교화가 목적인가? 아니다. 주경학자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그들을 “죄인을 물어뜯도록 훈련된 도덕 감시견 같다”고 표현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핵심인 사랑은 망각하고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기만 하는 잔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 레위기 20:10절과 신명기 22:22-24절 말씀을 염두에 두고 “반드시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라 했다(6절).
아마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이런 문제는 좀 적당히 타협하시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다. 비록 하찮게 보이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한 인격체, 예수님은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신다.
당시 세팅된 사건을 분석해보면 여자만 끌려 온 것이 이상하다. 뭔가 좀 냄새나는 느낌이다. 어떻게 현장을 덮치고도 여자만 잡아왔을까? 만일 남자가 도망쳤다면 도망치도록 방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애초부터 기획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은 이용당한 셈이다.
이슬람권에서는 간음과 관련된 이 율법이 오늘날에도 엄격히 시행된다. 여성들의 머리나 온몸을 가리는 차도르(얼굴만 내놓는 긴 망토)나 부르카(눈만 망사처리하고 몸 전체를 가린 것)만 봐도 알만하다. 성적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유혹이 될 만한 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린 것이지만 여성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것, 완전 무시당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거다. 여성만 가리고 고립당하는 것, 그래서 근래에 아프간 여성들은 자신의 딸과 그 다음 세대를 위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며, “죽어도 목소리를 내겠다”며 거리에 나와 반발하기도 했다.
요한은 그들이 이 여인을 잡아온 것은 ‘예수를 시험하려는 것’이라 했다. 그들이 로마법과 율법 사이에서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만들려고 함정을 팠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랑’을 가르치고,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이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 만일 ’용서해야 한다‘고 하면 율법을 깨뜨린 혐의로 잡히고, 로마법을 인정하는 매국노가 된다. 반대로 ’돌로 치라‘ 하면 그 동안 가르쳤던 ‘사랑’과 상반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다. 이율배반적이고 무자비한 자로 매도당할 것이 뻔하다. 또 유대인들에게 사형권을 주지 않은 로마 총독에 의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뜨리려는 고단수의 시험이었다.
이건 그들이 은연중에 죄를 짓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은 불행한 처지에 빠진 사람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만 죄인인가? 그들만 못됐나? 성경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릴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 위기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 위기를 기회로 삼으신다. 특이한 행동을 하신다. “예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6절), 평정심을 유지하실 뿐만 아니라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cool down) 시키신다. 돌을 들고 막 치려는 순간, 그 격한 마음을 가라앉히셨다. 쓰신 내용은 알 수 없다. 중세의 한 해석에 의하면 그들의 죄를 일일이 기록했다고 한다. 가능성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실 때 그들의 죄를 낱낱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 예수님은 그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셨다.
땅바닥에 글쓰기, 상상도 못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제 우리 삶에서도 차분히 앉아 글을 쓰는 것은 냉정함을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글을 쓰다 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 흥분해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경우도 있다. 또 생각의 실마리를 찾다 보면 새로운 희망이 발견되기도 한다. 흥분이 가라앉고 하나님의 뜻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일어나신 예수님은 흥분한 사람들을 향하여 입을 여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살기등등하던 사람들이 어른부터 꽁무니를 빼고 슬그머니 다 사라졌다. 예수님은 혼자 남은 여인을 향하여서도 말씀하셨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0-11절). 어찌보면 인간은 마지막에 혼자 남는 존재, 그리고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오십보 백보의 차이, 또는 감추어진 죄와 드러난 죄의 차이랄까? 그런데 예수님은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다. 함께 돌 맞으며 죄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 쓰러진 동료를 바라보는 시선, 더 나아가 대신 그 화살을 맞겠다고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아닌가? 주님의 관심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 다시 기회를 주어 죄와 싸워 이기게 하는 데 있다.
반면에 우리는 너무 쉽게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다. SNS상의 글들을 보면 자신들이 다 하나님이다. 함부로 심판한다. 하지만 유다서에 보면 마귀를 정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천사장마저도 함부로 판단하지 못한다(유1:9).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자신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만큼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은 하나님만 하시는 것이 맞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할 말 좀 하겠다며 사람을 정죄한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거다. 하지만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 교회는 은혜의 공간이어야 한다. 밀리고 밀려 막판에 위로와 사랑을 받으려고 왔을 수 있는데 교회마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율법대로 처리하면 되겠나? 교회는 사랑과 용서의 마지막 보루, 남의 죄를 정죄하하기보다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곳이다. 물론 전혀 정죄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위임이라는 것이 있다. 그 위임권을 행사하는 곳이 교회이고, 국가다. 세상에서는 국민의 위임에 의해서 국가가 형벌을 행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위임으로 행한다고 말한다. 재판관이나 검사가 왜 법 가운을 입나? 그것은 자신이 위임에 의해서 행한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정의로운 사람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 정의의 대리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법정에서 법기술을 이용해서 치우친 판결이나 기소를 행하는 행태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매우 중대한 범죄다. 법을 빙자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죄인과 의인으로 규정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바리새인 입장에서 보면 여인은 아주 나쁜 여인이지만 예수님은 죄는 미워도 사람을 미워하시지는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하찮게 여겼다. 덮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람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나? 한때 평등시리즈가 유행했었다. 50이 넘으면 외모의 평등, 배 나오고 엉덩이 처지고 두리뭉실 그 여자가 그 여자란다. 그리고 60이 넘으면 성의 평등, 남자는 순해지고 여자는 억새진다는 거다. 또 70이 넘으면 건강의 평등, 다 같이 늙어가고 다 같이 병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80이 넘으면 재물의 평등, 먹지도 못하는 데 돈 많으면 뭐하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차이 없다느 거고, 90이 지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했다. 살아있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거다. 평등의식으로 사람을 봐야 된다. 누가 누굴 정죄하나? 죄에 대해서 경고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율법 준수도 중요하지만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훈련, 덮어주고 사랑해주는 것, 죄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엄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정죄당하고 있는 여인보다 오히려 정죄하고 있는 그 교만한 자들을 공격하신다. 요한은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고 살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죄인, 곧 어둠의 사람들이 되었음을 부각시켰다. 정죄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궁극적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몫! 자기 죄를 알고 수치심과 공포심으로 꼼짝을 못하고 남아서 떨고 있는 여인, 예수님은 어둠에 갇힌 이 여인에게 다가가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용서를 선언하셨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질 수 있다면 예수님은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분, 그러나 돌이 아니라 파격적인 은혜를 베푸신다.
파격적인 은혜, 이 여인만 받았나? 다윗을 보라. 남의 아내와 간음(姦淫)하고 그 죄를 덮기 위해 그 여인의 남편을 죽게 했다. 그가 왕이다. 너무 끔찍한 파렴치한(破廉恥漢)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을 용서해 주셨다. 자기 안에 갇혀 실패했던 사울과는 달랐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다시 일어섰다. 반면에 유다는 자살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만 알면 사울이 되고 유다가 되지만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다시 기회 주시는 분으로 알면 다윗이 되고 베드로가 될 수 있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관심은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계속 우리에게 기회 주고, 도와주고, 의롭다 인정해주고, 기뻐해 주신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다고 악인을 정죄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도 정죄는 하시지 않았지만 여인에게 분명한 당부를 하셨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 “나도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이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 다독여 주신 것이라면 이 말씀은 “이제는 잘살아 보라”는 말씀, “거룩한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왜 이런 말 있지 않나?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주님은 지금 인간을 용서하고 있는 것이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받은 인간이 다시 죄를 짓지 않거나 자기 지은 죄에 대해서 충분히 책임을 진다면 주님의 용서가 완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용서받은 자가 여전히 동일한 죄를 반복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발생한 결과에 대해, 피해입은 자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용서해야 하나?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에 흥분했던 사람들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다”(9절). 부끄러움을 안 것, 그들은 현대인들보다 그래도 나은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양심에 화인 맞았다는 말이 적합할 것 같다. 결과와 승리에만 연연하여 양심의 가책은 더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이념적으로 교리적으로 짓는 죄가 너무 무섭다. 양심을 마비시킨다. 자신의 폭력이나 거짓 행동을 옳다고 정당화한다. 말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관심은 정죄가 아니라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 그게 인간다운 삶이기도 하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를 정죄하고 조소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 그 소굴에서 빠져나와 인간다운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 그래서 기회를 주고 도와주신다.
정리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은 노출된 죄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죄인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도망간 사람들이다. 또 다른 죄인도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들은 가면 쓴 죄인이었다. 노출된 죄인이든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죄인이든 아니면 가면 쓴 죄인이든 우리는 누구나 세 가지 유형 중에 속하는 죄인,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Go, and sin no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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