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남자 신생아 죽이라는 명령 내린 황제 아모스가 죽은 후,
멤피스 다스리던 아모스의 아들 아멘호테프 Ⅰ세가 황제가 되어 테베로 이주
그때 아멘호테프 Ⅰ세의 공주가 구출해 12세가 된 모세도 테베 궁전으로 데려갔을 것
“고대인도 우리와 같은 감정과 감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
관련 연구 통해 고대 인물의 삶과 성격에 대한 통찰력 얻어”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이야기가 요셉의 이집트 이주 기사(창 37장)를 기점으로, 팔레스틴의 족장 전승의 흐름에서 이집트 이후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은 모두 70인이었다(출 1:5, 창 46:8~27).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경은 400년(창 15:13) 혹은 430년(출 12:40)간 종살이를 한 후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600,000명의 ‘이스라엘 자손’과 ‘다른 여러 민족들’이었다(출 12:37~38)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더불어 탈출한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민 11:4)라고도 불렀다. 성경의 전승과 관련해서 볼 때 이집트 탈출의 무리는 이스라엘의 자손들뿐 아니라 전쟁 포로 혹은 노예들이 포함되었다.
전 세계 국가와 국제기구, 언론 등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이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책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Mary Nell Wyatt, 리진만 역)이 지난해 12월, 발간 1개월 만에 2쇄를 발간할 만큼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글에서 독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언제부터 애굽의 노예 생활을 했고 당시 애굽의 왕은 누구였을까?’라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로, 익히 영어 원서 『Battle for the Firstborn』은 ‘미국 아마존 화제의 도서’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본지는 이 번역본을 주제별로 발췌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테베의 파라오’ 아모스(Ahmose)는 힉소스족의 추방을 완료하고 이집트 북부의 통제권을 되찾았을 때 힉소스와 함께 살았던 이스라엘 자손이 그 나라에서 거주하도록 했다. 사실 학자들은 아시아인이 그곳에 계속 살고 있다는 증거 때문에 힉소스의 추방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여전히 그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인이며 히브리인인 존재를 확인한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부 지역이 힉소스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아모스는 공동 섭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힉소스를 추방했을 때 그는 북부를 통치할 공동 섭정을 임명해야 했다. 그 공동 섭정을 시작으로 왕들은 파라오라는 두 가지 직책에 대해 두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다음 아모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들은 온유하고 평화로우며 반항적이지 않았지만, 그들을 두려워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강하고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모든 신생아 남아의 죽음을 명령한 것이다.(출 1:7~22 참조)
◇‘아멘호테프 Ⅰ세’, 아모스의 아들, 공동 섭정이 됨
북부 영토가 재정복되고 국가가 통일됨에 따라 테베의 파라오 아모스는 북부의 문제를 관리할 공동 섭정을 임명해야 했다. 우리는 아모스가 특히 공동 섭정을 필요로 하는 그의 군사적 업적을 계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황제 파라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완벽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옆에 있어야 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이 직책에 임명하고 아멘호테프 Ⅰ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 아들은 멤피스의 파라오가 되었고 테베를 다스린 선임 파라오 아모스의 공동 섭정이었다. 아멘호테프가 살았던 멤피스와 아모스가 살았던 테베 사이의 거리, 약 375마일(약 604km)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거리였다.
◇기원전 1526년 모세의 탄생
아멘호테프 Ⅰ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북쪽에 살았기 때문에 히브리 남자 신생아를 죽이라는 산파들에게 아모스의 명령을 집행해야 했다.
출애굽 날짜를 기준으로 BC 1526년은 아모스가 히브리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칙령을 내린 해이자, 모세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것은 미래 출애굽의 날로부터 80년 전이었다.
파라오의 딸은 그녀의 아버지가 북부 파라오가 되었을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멤피스의 궁전으로 이사한 직후 모세를 구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북부 삼각주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구출한 때에는 테베 파라오 때가 아니었을 수 있다.
출애굽기 2장에는 모세의 탄생과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갈대 나무로 방주를 만들어 아기 모세를 나일강에다 두어 파라오의 딸이 그를 보고 구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누이는 그가 여전히 젖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파라오의 딸에게 그녀가 아기를 돌볼 히브리인 유모를 찾길 원하는지 물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모세의 친어머니를 데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파라오의 딸은 그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면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아모스의 명령 때문에 당시 공동 섭정인 파라오의 딸은 아이를 북쪽 궁전으로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해서, 모세는 친어머니와 몇 년 동안 계속 살았다.
이때부터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은 먼저 멤피스에서 공동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황제 파라오가 되자 테베로 옮겨갔다. 공동 섭정에게 하나의 이름이 주어졌고, 그가 황제 파라오가 되었을 때 다른 이름이 주어졌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같은 사람이 파라오로서의 위치에 따라 ‘투트모세’와 ‘아멘호테프’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모든 사건이 파라오의 통치 연도에 따라 날짜가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일단 파라오가 테베에서 황제가 되었을 때, 파라오가 두 종류 별개의 재위 연대표를 가졌다는 것이다. 하나는 그가 공동 섭정이 되었을 때 시작된 하나의 이름으로 된 연대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테베에서 황제가 되었을 때의 재위 연대기이다. 이것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아멘호테프 Ⅰ세에 대한 기록은 가나안이나 시리아에서 그의 편에서 어떤 군사적 행동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관리 중 두 명의 묘지에는 그가 누비아(Nubia)와 케헥(Kehek)으로의 여행을 이끌었다는 비문이 있지만, 케헥의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7년 차에 그는 누비아를 정복하고 완전히 이집트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것은 많은 문서는 아니지만 강조점은 황제로서 그의 아버지의 재위 기간이었다.
아멘호테프 Ⅰ세로 통치하는 동안 그의 아버지인 아모스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힉소스가 도망친 가나안과 시리아에 대한 이집트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주요 군사 행동을 수행했다.
◇아멘호테프 Ⅰ세는 황제 투트모세 Ⅰ세가 되었다
아멘호테프 Ⅰ세는 아모스가 죽을 때까지 멤피스에서 살았다. 테베의 선임 파라오가 죽자, 아멘호테프 Ⅰ세는 투트모세 Ⅰ세라는 이름을 추가로 취하고 황제로서 테베로 이사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누가 그것을 선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가족이 숭배하는 신의 이름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고위 파라오로 즉위한 해에 누비아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모스의 죽음으로 나라가 약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투트모세 Ⅰ세는 나일강을 타고 누비아로 가서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누비아 왕을 직접 죽이고 테베로 돌아왔을 때 그의 시신을 뱃머리에 매달아 과시했다. 누비아로의 여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는 세소스트리스 Ⅲ세가 건설한 제1차 카타락트에서 운하를 준설했다.
그의 2년 차에 두 번째 영토 확장은 북쪽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나하린, 미탄니 영토 및 시리아를 정복하는 것이었지만, 시리아 왕자들은 항복해 모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승리를 자축했다. 또 그는 코끼리 사냥을 위해 시리아의 니이(Niy)에 들렸다. 그는 분명히 상당한 천재성을 지닌 군사 지도자였다.
제18왕조는 이제 아주 위대한 국가가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위대한 국가의 주요 요인에는 그들의 노예 세력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다.
◇모세가 궁전으로 이사함
파라오 투트모세 Ⅰ세가 황제가 되어 테베로 이주했을 때 모세는 12세였고, 궁전에서 살기 위해 온 것도 이때였다. 모세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에 대한 성경 기록을 고려할 때 그가 더 이른 나이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그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배워야 했던 유일한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을 때였다.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점은, 공동 섭정인 아멘호테프 I세가 그의 아버지이자 수석 파라오인 아모스가 살아있는 동안 그 아이를 궁전에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아모스는 히브리인을 노예로 만들고 출생 시 모든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아모스는 북쪽 궁전에서 남쪽으로 375마일(약 604km)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소문이 들어갔을 것이다. 아멘호테프 Ⅰ세가 투트모세 Ⅰ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테베 황제가 되었을 때만 그는 자유롭게 모세를 궁전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우리가 역사적 자료를 읽을 때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연구를 정리하면서 나일강에 떠 있는 아름다운 아기와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의 아기를 특정 죽음으로부터 구하려고 그런 위험한 선택에 의지하고 있음을 이해했다. 나는 이 소녀가 아기 모세를 향한 큰 사랑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Ⅰ세도 그 아이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입양을 그녀에게 허락했기 때문에 딸에게 매우 인자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론에게 배운 한 가지는 이 고대인들이 여전히 같은 감정과 감성을 가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모든 연구에서 내가 얻은 가장 놀라운 것은 고대 인물에 대한 감사와 그들의 삶과 성격에 대한 통찰력이었다.
◇이집트 18왕조 연대표 확정
처음으로 정리한 연대표를 구성한 후 나는 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내 연구 초기에 나는 아멘호테프 Ⅰ세의 통치 연대를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아래와 같은 정보를 발견했다.
“다음 날짜는 영수증에 사용된 날짜를 실제 시간표로 올바르게 변환할 수 있도록 달력이 추가된 의료용 파피루스에 의해 제공했다. 여기서는 11월 9일이라고 한다. 아멘호테프 Ⅰ세의 9일은 천랑성(天狼星)- 기원전 1538년의 나선형 상승의 날이었다.
그러나 이 날짜는 천문 관측이 멤피스의 오래된 거주지에서 수행된 경우에만 정확하다. 제18왕조의 경우 날짜를 20년 단축해야 한다. 즉, BC 1518년이다.” (『Encyclopaedia Britannica』, 1985 ed. vol. 4 pp. 575~6)
나의 연대표는 이미 아멘호테프 Ⅰ세의 9년이 기원전 1518년임을 보여 주었는데, 테베에서 헬리컬 상승의 날 준수가 기록된 경우 파피루스에 기록된 정확한 날짜이다.
자료가 부족하여 문제가 되는 고대 기록의 여러 문제점을 발견한 나에게는 놀라운 확인이자 큰 격려가 되었다.
◇재위 연도가 누구에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혼란
아멘호테프 I 세의 통치 경우와 같이 문서의 부족에 더하여, 나는 몇몇 파라오의 통치 연도 중 일부가 잘못되어 다른 파라오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기념물과 기록에는 파라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통치 날짜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파라오가 두 개의 다른 통치 연도 목록과 함께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에 때때로 파라오의 통치 연도는 그의 다른 능력으로 그에게 귀속된다. 때때로 그것은 완전히 다른 왕에게 귀속되기도 한다.
혼란의 또 다른 원인은 일부 관리들의 묘지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묘지에서 그들은 신들이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알 수 있도록 업적을 벽에 남겼다. 이 비문 중 일부에서 관리들은 각 파라오 아래에서 그들의 공적을 나열한다. 마치 투트모세와 아멘호테프가 각각 별개의 개인인 것처럼 나열하지만, 사실은 각 왕이 그의 두 위치에서 각각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이다.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이 묘지 비문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연구하는 나 역시 편견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기념물과 사원 벽에서 수집한 대부분의 정보는 내가 연구한 대로 간단했다.
나는 론 와이엇의 이론에는, 대부분의 파라오가 공동 섭정으로, 그다음에는 황제 파라오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독자들이 명심해야 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사진) 번역: 리진만 선교사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