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3-17)
오래 전 미국으로 조기유학 온 한 여고생 신자를 심방했던 때 일입니다.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고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매일 아침 잠언 한 장씩 읽는다고 답했습니다. 그것도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잠언이 마침 31장으로 이뤄졌으니 한 달에 한 번씩 읽을 수 있고 또 일 년이면 같은 장을 12번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의 달달 외우는 수준입니다. 한국에 있는 어머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머나먼 타국에 여학생 혼자 생활하다 보면 부딪힐 수 있는 이런 저런 유혹과 시험을 말씀으로 이겨내라는 뜻이었던 같습니다.
상당한 일리가 있고 어지간한 정성과 믿음이 없으면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분명히 많은 유익이 있는데다 부모님이 시킨 일을 목사가 섣불리 시시비비를 따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주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을 해주고 다른 성경도 함께 읽어 보라고 권하고 헤어졌지만 뭔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끝내 지울 수 없었습니다.
잠언은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권면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성품을 갈고 닦아서 올바른 인간관계로 이끄는 길들을 보여줍니다. 현실 문제와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관한 가르침도 많습니다. 정말 그 여학생처럼 매일 아침마다 한 장씩 읽은 후에 그 날을 살다보면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세상의 시험 유혹 고통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상기 본문에도 인생살이에 도움 될 만한 지혜로운 권면이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조건을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하며, 지식에 따라 현명하게 행동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 조건을 각각의 반대되는 상황과 대조하여 그 장점과 유익을 더욱 돋보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과 근심, 지식과 미련함, 사랑과 미움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도 행복해지려면 이 세 조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서 만병이 온다고 합니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현세대에선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미워하면 현실적 상황만 이래저래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본인의 건강까지 해집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자에겐 엔돌핀이 생성되어 젊어지며 행복해진다는 것까지 검증된 진실이 되었습니다.
그럼 잠언과 세상 가르침의 차이는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부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에 ( )를 쳐서 인용했습니다. 그 구절이 빠져도 전체적인 뜻의 흐름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 세 마디가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에 따라 신자와 불신자의 인생관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마음을 다스리고, 지식을 추구하고, 서로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신자들보다 그 열매를 많이 맺는 불신자도 꽤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태여 여호와가 필요하다고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의 사정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인생행복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추가적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즐겁게 먹고, 지식을 추구하며, 서로 사랑하고, 여호와를 사랑하면 행복해진다고 봅니다. 불신자들보다 요소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입니다. 또 그 넷을 행복을 이루는 동등한 요소로 병행의 위치에 둡니다. 잘해야 여호와 경외를 첫째로 꼽는 정도입니다.
바꿔 말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은 교회에서의 종교적 활동으로 제한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행해야 할 여러 일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에선 세상에서 통용되는 방법으로 살다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교회의 관습, 전통, 양식에 따라 행동합니다. 세상 방식이라고 해서 탐욕과 사기와 부정을 동원해서 재물만 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자는 아예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격을 도야하고 인간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에 관한 세상 여러 현자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오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세상 현자들의 가르침도 훌륭하고 본받을 바가 많아 그대로 지키면 많은 유익이 따릅니다. 제 뜻은 많은 신자들이 상기 본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읽고 치운다는 것입니다. 그 구절은 본문과 무관하거나 보조적 의미로만 받아들입니다.
솔로몬은 행복의 세 요소를 각기 반대 개념과 대조해 설명했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는 대조되는 개념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산이 적어도 즐거운 것과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을 대조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일종의 삽입구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여화와를 경외하는 것의 반대는 당연히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기 구절을 정확한 의미로 고쳐 쓰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가산이 적어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음으로써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가 됩니다.
이제 잠언을 읽을 때 신자들이 놓치거나 부족하게 이해하는 측면이 무엇인지 눈치 챘을 것입니다. 반드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산이 적어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진리를 간과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여호와 경외는 종교적 열성으로 뜨겁게 달성하려 하지만, 그와 별도로 가산이 적어도 즐거워하는 일은 자신의 성격적 도덕적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려 합니다. 유학 온 여학생이 잠언을 열심히 베껴 쓰고 묵상하는 것만으로 즉, 그런 종교적 노력과 실천만으로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혹시 착각하지 않나 염려되어서 저로선 뭔가 부족함을 지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에 가산이 적어도 즐거워한다는 말은 가산이 많고 적음 때문에 자신의 희비(喜悲)가 전혀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산을 많이 늘려주어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품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이미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가산이 많아지면 더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여호와가 때로는 궁핍으로, 질병으로, 고난으로, 핍박으로 내몰더라도 그분의 나를 향한 신실하신 긍휼과 은총과 권능에 하등의 감소가 없음을 확신하기에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범사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을 단지 신자가 행할 여러 항목 중의 하나로 여겨선 안 됩니다. 그 일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자신의 의사 판단, 선택, 결정, 시행, 점검, 평가 등에 절대적이고도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향과 목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불신자들의 마음 가꿈과 이웃 사랑이 신자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그들도 마음이 즐거워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마음 자체가 상대적, 가변적, 자기중심적, 물질 중심적, 이 세상 제한적, 쾌락 추구적인 상태로 이미 완전히 변질되어 있음을 모릅니다. 또 그런 사실을 인정조차 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허물이 많은 마음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하고도 순수한 즐거움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지식을 얻는 일도, 서로 사랑하는 일도 그런 불완전한 마음 바탕에서 이루려 하니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성 자체가 어리석고 불완전해 온전한 지식을 얻지도 활용하지도 못합니다. 이기적 감성으로는 자기와 가족이 아닌 자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도 즐거운 마음과 현명한 지혜와 상호사랑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식하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에선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도 이전 불신자 시절에 동일한 시행착오를 숱하게 겪었습니다. 즐거운 마음, 현명한 지혜, 온전한 사랑을 하려 열심히 노력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나의 나됨을 오직 나 자신의 부족하고도 흠결이 많은 지식과 성품에서 찾았으니 도무지 충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절망에 빠져 있는 와중에 주님이 먼저 찾아와서 십자가 은혜 가운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영과 접속 교통함으로써 마음의 온전한 즐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날마다 내 삶의 세밀한 구석까지 넘치도록 채워지기에 현실적 가난과 부요와는 전혀 무관하게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배우고 실행함으로써 그분의 지식에까지 자라게 됩니다.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줌으로써 나의 교만한 성품과 스스로의 의지적 노력으로 행했던 이전의 섬김과 달리 온전한 사랑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본문은 물론 잠언 전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말을 모든 문장의 서두에 반드시 붙여서 읽어야 합니다. 실제로 잠언은 1:1-6까지 저자와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 후 곧바로 “여호와를 경외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라고 절대적으로 전제 해놓았습니다. 이후의 모든 잠언을 그런 바탕에서 진술하겠다는 뜻입니다. 절대로 일반적 도덕이나 종교 계명 수준으로 격하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별도로 하고는 마음의 즐거움, 현명한 지혜, 서로 사랑이라는 행복의 세 요소를 달성하려고 노력조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금 잠언을 필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부터 근본으로 가르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도덕을 더 잘 지켜야 한다는 정도로 가르치는 것 같아 큰일입니다.
2015/2/1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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