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나비는 “3·1독립선언은 해외에서 준비하고 국내에서 위대한 결실을 맺은 독립운동”이라며 “3·1독립선언은 국내외 비폭력 저항 운동의 위대한 결실이 낳은 운동”이라고 했다.
특히 “3.1독립운동은 애국애족의 염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실천한 비폭력 운동이었다”며 “1919년 4월 4일 전북 이리 장날 기독교인이었던 군산 영명학교 문용기 선생이 독립운동을 주동했다. 그는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 거사를 거행하기로 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1천여 명이 시위행진을 이어갔다”고 했다.
이어 “일본 헌병대는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까지 동원하고 총칼과 총검, 곤봉과 쇠갈고리를 휘두르며 잔인하게 진압했다. 문용기 선생은 오른 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며 “선생은 군중을 이끌고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격분한 일본 헌병은 그를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했다. 독립만세, 힘찬 함성과 함께 선생님은 순국했다. 애국애족의 절개를 끝까지 비폭력 운동으로 고귀한 희생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성도들이 한결같이 보여준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의 비폭력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3.1독립운동 국외 확산은 조선과 교회를 사랑한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의 수고였음을 기억하자”며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알렸다.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는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다”고 했다.
이들은 “그리고 1919년 4월 5일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은 역사 속에 사라질 뻔했다.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선교사는 영국계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한국명 석호필)였다”며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 그 상황을 세상에 알린다. 스코필드 교수는 지속적으로 조선인을 돕다가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다. 그는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최초로 안장되었다”고 했다.
샬롬나비는 “그리고 제암리 학살사건을 알린 일본인이 있다. 도쿄대학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던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斎藤勇, 1887-1982)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무도함으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弔儀)를 담은 『어느 살육사건』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지에 발표했다”고 했다.
이들은 “제암리 학살사건은 일본에서 거의 잊혀질 무렵 1965년 일본 개신교계 인사들이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당시 일본해외선교회 소속 목회자가 학살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제암교회 소타(焼打)사건 속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 개신교의 속죄 헌금을 모금하여 교회당 재건 및 추모시설 건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고 했다.
이어 “일부 유족들은 ‘일본인 돈으로 교회를 지을 생각이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일본 교인들은 거듭거듭 간곡한 속죄를 청했고 제암교회 측도 1968년 2월에 이를 수락했다”며 “그래서 사건 발생 50주기인 1969년 4월 15일 기공식을 시작으로 1970년 9월 22일 사죄의 교회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거행했다. 일본은 일본 개신교계의 양심어린 반성과 사죄 노력을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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