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듯, 좋은 설교자도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작가는 정지된 ‘공간’(비워 둔 종이)의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반면, 설교자는 흐르는 ‘시간’의 표면에 그림을 그린다. 몇 시간, 몇 날, 몇 년에 걸쳐 영원한 말씀에 관한 노래들과 이야기들을 새롭게 그려 낸다. 설교자의 소명은 숙련가가 아니라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똑똑함을 갖추고 유창하게 말하게 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실한 태도와 지혜로움이 우선이다.
저자 故 유진 피터슨 목사의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특별한 절기가 없는 연중 시기에 이르기까지 총 41편의 설교를 모아 본 도서가 출간됐다. 이 책은 설교자와 성도 모두를 일상의 시간 안에 깃든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는 말씀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바울의 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세계를 둘러보라고 말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부, 우리의 삶, 우리 주변의 삶, 사람과 동물과 집과 음식처럼 눈에 보이는 세계와, 생각과 감정과 사상과 느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아우르는 모든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다.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신 그분을 보지 못하면 온 세상이 공허하고 비어 있고 무의미하게 보인다. 창조세계 안에서, 즉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본 우리는 그분을 아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창조세계의 즐거운 의미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모든 창조세계 안에서, 거기 깃든 말씀인 사랑과 은혜로 행하시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어 “가장 좋은 교회는 위원회가 없고 조직도 없고, 주일과 주일 사이에 교회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일 것이다. 교인들이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말이다. 주중에 우리는 나가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증거하고,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대로 섬김과 고난의 길을 가는 백성이 되기 위해 책임감 있게 최대한 열심히 일한다. 우리는 일한다. 우리는 행한다. 하지만 ‘일곱째 날’(그리스도인에게는 첫째 날)이 되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곳에 온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누린다. 우리는 염려에서 벗어난다. 자유로워진다. 다시 어린이가 된다. 하나님이 다 하시도록 맡기고, 우리는 찬양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임재를 인식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을 우리 삶을 개선하는 관점에서만 생각한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이 햇살이 빛나는 오후의 산책과 같다는 듯이 말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과연 그렇다고 생각할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얼마나 다르게 묘사하는지 주목해서 보길 바란다. 그분의 발걸음은 가망 없는 병자, 의심에 시달리는 사람, 고뇌하는 유족, 소외되고 멸시받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격동하는 정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신 예수님은 며칠 만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기독교 복음 바깥에 있는 종교는 대부분 두려움과 신비를 다룬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두려움의 근거가 되는 모호함, 막연함, 신비의 그림자가 쫓겨나고 하나님과 관련된 확실한 소망, 분명한 사랑, 확신에 찬 기쁨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많은 신들 중 하나에 불과한 종교적 환경으로 우리가 다시 미끄러지면, 옛날의 반신(半神)들이 몰래 돌아와 사악한 일을 벌인다. 종교는 모두 신화와 미신으로 납작하게 축소되고, 신화와 미신에서는 이 사람의 의견이나 저 사람의 의견이나 마찬가지다. 두려움이 부풀려져 교리가 되고, 죄책감은 신의 목소리로 오인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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