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국가와 국제기구, 언론 등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이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책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Mary Nell Wyatt, 리진만 역)이 지난 12월, 발간 1개월 만에 2쇄를 인쇄할 만큼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고고학자이자 열렬한 성경 연구가였던 론 와이엇(Ron Wyatt)은 성경의 렌즈를 통해 오늘날 많은 전문가와 종교학자들이 정통으로 인정하는 성경에 언급된 여러 장소를 발굴했다. 이집트,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남편 론과 저자 메리 와이엇이 발굴하고 정리한 자료들은 이제 신뢰할 만한 출애굽 시대의 연대기, 진정한 홍해 횡단 장소, 진정한 시내산, 진정한 노아의 방주로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이 책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힉소스(헷 족속), 모세를 나일강에서 구출한 공주(네페루레)와 모세의 왕궁 생활에 관해 궁금증을 풀어준다.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로, 익히 영어 원서 『Battle for the Firstborn』은 ‘미국 아마존 화제의 도서’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새해를 맞이하여 기독일보와 선교신문은 번역본을 주제별로 발췌해 소개하려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있다고 언급하는 비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제19왕조의 네 번째 파라오인 메르넵타의 석비에 있다. 이 비석의 날짜도 출애굽 이후이며 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셈족을 말하는 혼혈인 ‘힉소스(Hyksos)’라고 불리는 삼각주 지역에 들어온 외국인이 있었다는 충분한 문서가 있다. 힉소스는 출애굽으로 이어지는 사건에 매우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힉소스족은 셈족이었기 때문에 히브리인이었다고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힉소스는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야곱의 가족에게 주어진 매우 넓은 땅에 정착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집트의 많은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는 데 일면 영향을 미쳤다.
삼각주에 있는 그들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거기에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이 넓고 물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고향에서 환영하여 그들과 함께 정착한 것이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힉소스는 참 하나님의 숭배자가 아니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힉소스 왕조는 세력과 힘이 세졌고 결국 원주민 애굽 왕조 가족을 괴롭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왕조를 세웠고, 그들 자신의 신을 가졌고, 말과 같은 새로운 종의 동물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선진 기술을 전파했다. 그들은 처음에 말과 전차를 전쟁 기계이자 첨단 무기로 소개했다.
그들의 수도는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약 64km 떨어진 이집트 삼각주의 아바리스였다. 1960년대부터 오스트리아 고고학자 만프레드 비탁(Manfred Bietak)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그의 발굴 결과 이 도시는 나일 지류를 통해 지중해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입품 무역의 주요 수도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원은 이집트 신에게 바쳐진 것이 아니라 바알 스본(Baal Zephon)과 같은 시리아의 폭풍 신에게 바쳐졌다.
인구가 약 25,000명으로 추정되는 도시는 규모가 컸다. 그들은 외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다른 기술과 함께 유리 제조를 이집트에 도입했다.
힉소스에 대해 많은 글이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이 그들이 이집트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점령한 약탈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사뭇 다른 것 같다.
이집트의 역사가인 마네토는 그러한 암울한 빛 속에서 처음으로 그들을 기술한 학자이다. 대신, 증거는 이집트에 위대한 지식을 가져다준 사람들이 나중에 제18왕조에 의해 가장 위대한 세계 제국의 지위를 얻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그림을 그린다.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결정이 곧 내려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살리에르 파피루스(Sallier Papyrus) I 세에 힉소스 왕 아페피(Apepi)와 이집트 왕 세케넨레(Seqenenre)에 대한 대단찮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 땅은 불순한 자에게 속해 있었고, 그 당시에는 군주가 없었으므로 속눈리(Soqnun-ri) 왕이 남방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였다. 라(Ra) 성읍의 불순한 자들이 하우아루(Hauaru)에서는 라포삐(Ra-Apopi)의 통치를 따랐다. 온 나라가 속눈리 왕에게 생산품과 함께 공물을 바쳤고, 그래서 그에게 토미리의 모든 좋은 것들을 실어 보냈다.
이제 아페피 왕은 수텍후(Sutekhu) 신을 그의 주인으로 삼았고, 그는 더 이상 수텍후 신을 제외한 전국에 있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않았으며, 왕의 문 앞에 훌륭하고 불멸의 솜씨로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수텍후 신에게 매일 일어나 희생 제물을 바쳤다. 프라하르마쿠티 사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권자의 가신 추장들이 화환을 들고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아페피 왕은 남쪽 도시의 왕자인 속눈리 왕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 소식을 전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러 날 후, 아페피 왕은 그의 대장들과 신중한 장군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수장들을 소집했지만, 그들은 속눈리 왕에게 보낼 좋은 연설을 그에게 제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압드피 왕은 주술에 정통한 서기관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오 종주(宗主)여, 우리 주군이여.” 아페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골의 운하에 있는 하마를 웅덩이에서 쫓아내어 그들이 밤낮으로 나를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는 좋든 나쁘든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에게 다른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내 말에 대답할 수 없으니, 그가 수텍후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만일 그가 대답하고 내가 그에게 명한 대로 행하면 내가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다시는 그 땅의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리라. 신들의 왕인 아몬라를 제외한 이집트의 왕이 말한다.”
그리고 며칠 후, 아페피 왕은 마법에 정통한 그의 서기관이 그에게 제안한 메시지를 남쪽 나라의 왕자에게 보냈다. 그리고 아페피 왕의 메신저가 남쪽 땅의 우두머리에게 왔다. 그는 아페피 왕의 사자에게 말했다.
사자가 대답했다.
“아페피 왕이 보내어 말하기를 나라의 운하에 있는 하마를 웅덩이에서 쫓게 하여 그들이 밤낮으로 왕을 방문하도록 허용할 수 있게 하랍신다....”
남쪽 땅의 왕은 놀라서 아페피 왕의 사자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남방 땅의 왕이 사자에게 말했다.
남방 땅의 왕은 모든 종류의 좋은 것 고기, 과자, ... 그리고 포도주를 사자에게 주게 했다. “돌아가서 당신의 주군에게 말씀하십시오. ...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아페피 왕의 메신저는 그의 주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마음먹었다.
그런 다음 남부의 왕은 그의 대장들과 그의 유능한 장군들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수장들을 소집하고 아페피 왕이 그에게 보낸 모든 메시지를 그들에게 반복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긴 시간 동안 한 입으로 침묵했고 좋은지 나쁜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페피 왕은 마법에 정통한 그의 서기관들이 그에게 제안한 다른 메시지를 남부 땅의 왕에게 보냈다....”
파피루스가 손상되었거나 완성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가 있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제17왕조는 이집트 남부의 테베를 통치했고, 힉소스 왕조는 북부의 아바리스를 통치했으며 제15왕조로 여겨진다.
힉소스 파라오인 아페피 왕은 이전 파라오의 기념물을 찬탈하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새겼으며 결국 테베(Theban) 왕을 괴롭히기 시작하여 살리에르 파피루스 I 세에 관련된 메시지가 절정에 달했다.
우리는 이 두 통치자 사이의 이전 상호 작용에 접근할 수 없지만, 이것이 제17왕조 테베 왕, 세켄레 타오(Seqenenre Tao)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북부 파라오와 전쟁을 벌였고 전투에서 패했다.
파라오 세켄레의 미라는 끔찍한 머리 상처를 보여준다. 그의 부상을 힉소스 전투 도끼와 비교했으며, 그의 부상이 그러한 전쟁 도구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하기로 했다.
세켄레는 그가 전투에서 사망했음을 가리키는 매장을 위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미라가 되었지만, 그의 몸에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상처가 드러난다.
세켄레의 아들 카모세(Kamose)는 아페피 왕과 전투를 계속했지만,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마침내 카모세의 형제인 아모스가 전쟁을 끝내고 힉소스를 이집트에서 추방했다. 이 셈족 사람들은 그 나라를 떠나 원래 살던 가나안, 시리아, 레바논으로 돌아갔다.
린드 파피루스(Rhind Papyrus)는 아모스의 군사 전략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힉소스 수도는 나일강 삼각주의 아바리스(Avaris)였다. 전략적으로 그는 아바리스를 공격하는 대신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를 점령한 다음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주요 국경 요새인 자루(Tjaru)를 점령했다. 자루를 점령하고 그는 가나안과 아바리스 사이의 통로를 막았다. 이 봉쇄로 인해 보급품이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에바나(Ebana)의 아들 아모스의 묘지벽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아모스는 힉소스 수도인 아바리스에 대한 세 번의 공격을 이끌었지만, 그의 관심을 끌었던 이집트 더 남쪽에서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마침내 아바리스에 대한 네 번째 공격에서 그는 승리했다.
3년간의 포위 끝에 그는 샤루헨의 가자 근처에 있는 그들의 요새를 점령했다. 그가 추방을 마친 지 여러 해가 지난 재위 22년에 투라의 채석장 개장과 관련된 비문에는 ‘가나안의 소’가 사용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추방된 힉소스에게서 얻은 공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다음 그는 시리아와 누비아에서 군사 작전을 계속했다.
그 후 파라오 제18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가 되었다. 테베에서 통치하면서 그는 북부 이집트를 장악했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추방했다. 무대가 마련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사진) 번역: 리진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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