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는 이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멜빈 목사님과 사역을 20여년 가까이 하면서도 아프리카 학생을 돕고 있다는 얘기는 나에게 한 번도 안 하셨다. 멜빈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오길라가 부총장이 된 다음에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를 나에게 해서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사역을 할 때 나와 우리 연구소 스태프들이 멜빈 목사님을 많이 원망했었다. 그렇게 가까이 하면서 10원도 안 도와 주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못 도와주신 것이다. 아프리카인 오길라 부부와 자녀를 다 대학의 가족 기숙사에서 넣어서 4-5년 지원했으니 우리 한국 사역을 도와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예상하기로 1억 이상 오길라 공부에 투자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한테 외국인을 도와주니 한국은 못 도와 준다는 얘기를 안 하신 것이다. 직접 몇 번 만났는데도 얘기 안 해주셨다. 정말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실천적 교훈이 되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카니(Connie) 할머니이다. 케나다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임상목회훈련(CPE)을 받아야 하는데 토론토에서 실습할 곳이 마땅치 않아 몇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우드스탁(woodstock)이라는 곳의 정신박약아 센터(Mentally Retared People)에서 실습하도록 배정되었다. 다행히도 지도교수 뮤리엘(Muriel) 할머님(당시 70세 이상 들어 보였다.)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10여년 이상 사역하셨던 분이었기에 나 같은 동양인을 잘 이해해 주셨다. 영어도 잘 못하고, 또 문화도 캐나다와 한국은 많이 다르니 그 교량역할을 잘해주셨다. 당시 나머지 6명은 전부 캐나다인으로 좋은 대학들 나왔고 나보다 경험들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토론토에서 너무 멀기에 매일 출퇴근은 어려우니 방을 하나 구해서 주간에 근무하고 주말에는 토론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뮤리얼 지도교수님이 본인의 친구라면서 단독주택을 소개해주어 2층에서 몇 달 기거하게 되었다. 집주인인 카니 할머니는 일반 병원의 사무직원으로 거의 30여년간 근무하시고 계신분이었다. 매일 아침 그분은 그 병원에 근무하러 출근하셨고, 나는 정신박약아 센터로 가서 실습을 6개월간 하였다. 그 집에 입주할 때에 한 달에 250불씩 내기로 계약했다. 내가 학생이었으니까 싸게 해주신것 것 같았다. 그런데 6개월 실습을 마치고 보따리를 싸 가지고 토론토로 올려고 출발하려 하니 카니 할머니께서 할 얘기가 있다고 잠깐만 보자고 하여, 거실 의자에 앉았는데 봉투를 하나 내미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낸 방세를 쓰지 않고 모아두었는데 이제 돌려주겠다며 갖고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좀 당황했고 또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아두었던 것이라하여 안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나는 학생으로 또 가족과 함께 토론토에 지내고 있었기에 봉투에 든 1,500불은 큰 돈이 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멜빈 목사님의 그런 모습, 또 카니 할머니의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 나로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정말 배워야 할 모습들이라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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