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을 병으로 누워지냈던 사람에게 그날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 집집마다 가족들이 모이고 양이나 염소를 잡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준비해서 축제를 즐기는 유월절 명절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유월절 명절이라 착잡했었다. 기쁘기는커녕 서러운 날, 누운 채로 또 한 번의 유월절을 맞는 게 슬펐다. 가족들과 단절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채 감당할 수 없는 질병으로 누워 고독으로 몸부림친 지 38년,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침상도 낡을 대로 낡고, 옷도 헤어질 만큼 헤어졌다.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매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며 살았다.
그런데 그날 우연히 한 그림자가 그를 덮었다. 눈을 들어보니 이름도 성도 모르는 분인데 “낫고자 하느냐?” 묻는다. 이상한 질문이지만 그 질문이 화석처럼 굳었던 마음을 열고 가슴을 깨웠다. 이어서 “내가 물속에 넣어주겠다”가 아니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다. 장엄한 명령이다. 이상한 감동이 밀려온다. 몸 구석구석에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친다. 놀랍게도 굳었던 근육이 움직인다.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일어났다. 지긋지긋한 침상을 들고 걷는다. 기적이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그날은 그에게 진정한 유월절이 되었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날, 이 엄청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너무 큰 은혜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며 씁쓸함이 밀려온다. 은혜받은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38년간 병을 앓다가 나음을 입은 사람의 태도가 이럴 수는 없다.
고쳐주신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이 사람을 보고 유대인들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그는 누군지 모른다고 대답한다(12-13). “내가 들고 간 게 아니라 들고 가라고 했어요” 그런 셈이다. 잊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은인 아닌가? 그런데 그 은인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요한은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다”(13절)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았던 것과 명함 한 장 주지 않고 떠나신 것이 이유가 될까? 그렇게 빨리 떠나실 줄 모르고 너무 좋아 침상을 들고 걷다가 타이밍을 놓쳤을까? 이해가 안 된다. 이건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다. 최소한 “당신은 누구십니까?”는 물었어야 했다.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은 “애티튜드(Attitude)를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유일한 차이”라 했다. 후천적 노력으로 성공에 다가설 수 있는 삶의 틀이 애티튜드다. 이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몸의 반응, 행복과 성공을 지향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기본적인 것조차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도 아니고 예수님이 피하셨기 때문도 아니다.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자기 병 낫는 것만 목적, 그래서 자기 병 고쳐 줄 베데스다 연못에 믿음을 두었다가 잠시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분에게 믿음을 걸었을 뿐, 예수께는 관심이 없었다. 속물이다. 감사를 표하는 말 한마디 없는 사람, 그는 철저히 자기 신상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사람이었다.
물론 예수님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같으면 동네방네 알리고 부흥을 이룰 기회로 생각할 텐데 그 엄청난 기적을 행하고도 슬그머니 피하셨다. 이런 게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인 것 같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일이니 무조건 잘하신 일로 여기고, 예수께 집중하는 스탠스(stance)를 기본으로 여겨야 한다.
예수님을 고발하기까지 한다
자리를 들고 가다가 유대인들을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선뜻 고향 집으로 갈 수 없었을까? 이 사람은 성전으로 간다. 안식일 범한 책임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를 고쳐준 사람을 찾아볼 생각이었을까? 이어진 말씀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14절), 걷다보니 성전, 그가 찾았다기보다 예수님이 후속 조치를 취하신 거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왜 또 만나주셨을까? 생색내고 자랑하거나 영광 받기 위함일까? 아니다. 진짜 자유함을 누릴 기회를 주신 거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 일종의 후속 조치(After Service), 다시 병이 재발하거나 또 이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록 지금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은혜받은 자답지 못한 그에게 긍휼심으로 다시 만나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질병 고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구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이 말씀을 하지 않고 성전에서 하셨을까? 급해서 못하셨나?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있는 베데스다에서 그 말씀을 하셨다면 더 폼나고 영광스러우셨겠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사람이 더 집중할 수 있는 곳을 택하신 것 같다. 치유나 기적 사건에 그 대상자의 이름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님은 고치신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다. 일체 다른 것을 추구하는 분이 아니셨다. 자랑과 영광과 재물과 권력 추구를 당연시하는 현대인들의 의식구조로는 이해가 안될 것이다. 그건 물질적 욕망이 자기 직업의 본질이나 보람을 다 빨아들이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 그만큼 때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태도야 그렇다 할지라도 병자의 태도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회를 주셨건만 그는 “생색내시나?”하는 식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거저 38년을 지긋지긋하게 지옥처럼 살다 이제 금방 고침을 받았는데 바로 안식일을 범한 죄인으로 찍힐 수는 없다는 태도다. 그래서 기회를 주신 예수님께 땡큐는 고사하고 자신을 고친 이는 예수라고 고발한다(15절). “큰일 날뻔했는데 잘됐다, 이 사람 핑계대야지” 안식일을 범했다면 책임이 이 사람에게 있다는 식이다. 그래서 다음절이 쓰인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16절).
D.A.카슨(Carson)은 이 사람의 이 행동을 ‘반역이라기보다는 둔감함의 죄’라 했고, J.R.힐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죄이기에 ‘배반이라기보다는 신변위협을 느낀 책임 전가’라 했지만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중증시각장애인’의 경우와는 너무 비교된다. 약삭빠른 것 같으나 어리석고 비겁하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경험하고도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은혜받고도 질병 치유에만 머무르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90년경에도 많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이용만하기 때문이다. 복 받기 원하고 평안을 원하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헌신이나 희생에 눈 감으면 안 된다는 말씀들이다.
요한이 이런 내용을 기록한 이유는 경고를 위함이다. 고질병 고치고도 구원을 놓친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이런 수준으로 살다가 멸망하지 않았나? 자신의 소원 성취에만 집중하지 말고 인생을 예수님께 걸어야 한다. 본문의 이 사람은 은혜받은 자답기는커녕 파렴치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리도 하나님을 손님이 주문하는 음식을 날라다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웨이터 취급하면 안 된다.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
안식일 어겼다고 난리치는 사람들
병자였던 이 사람도 문제지만 병 고침 받은 것을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안식일을 어겼다고 문제 삼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은혜 받은 사람답지 못하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사회와 종교의 지도층이다. 하지만 사실은 핵심을 벗어나 주변만 맴도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에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3년도 아니고 38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점을 조금만 생각했다면 축하부터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생명이 38년 만에 자유함을 누리는 이 엄청난 상황 앞에서 감격보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율법을 들이대며 문제 삼는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0절). 그들은 율법 때문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한 마디로 왜곡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율법과 제 밥그릇 챙기기, 그저 자신들의 권위 실추와 영향력 감소, 기득권을 누려온 것에 흠집이 날까봐 분노할 뿐이다. 그래서 누가 병을 고쳤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안식일에 걸어가라 했느냐를 묻고 있다. 예수님이 시키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공격할 절호의 찬스로 여긴 것이다.
율법주의가 문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금하는 계명을 무려 39가지나 두었다. 안식일에 짐을 들거나 옮겨서도 안 된다. 바늘 하나 옮길 수 없다. 그런데 병자였던 이 사람이 자기 침상을 들고 가자 딱 걸렸다고 난리다.
안식일에는 병도 치료할 수 없다. 상처가 악화되지 않도록 보호조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일체의 치료행위는 안 된다. 배가 고파도 밀 이삭 하나 비벼 먹을 수 없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도 이 조항에 걸렸다. 유대인 근본주의자들은 지금도 안식일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 안식일에 엘리베이터의 버튼도 누를 수 없기 때문에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에 자동적으로 전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조작한다.
코로나 사태 때 이 안식일 조항이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불피우지 말라는 조항 때문에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어서 온라인 예배나 동영상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장 대면 예배만 고수하다가 회당 예배가 이스라엘 내 코로나 확산의 주요인이 되기도 했다. 율법이 생명을 위협한 것이다. 다행히 방역 대책을 잘 세워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마스크를 벗는 나라가 되기도 했지만 유대교인들에게 율법은 큰 부담이요 무거운 짐이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 안식일 날에 병을 고치셨을까? 다른 날에 고쳐도 될 일, 38년 병자였는데 하루를 못 참아서 그러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해 사고(?) 치셨다.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생명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잘못된 적용도 간과할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의미를 바로 잡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여러 번 도전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눅6: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복되고 거룩한 날이라고 선언하셨다. 사람의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근본 정신인데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박해하는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며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同等)으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 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18절). 물론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 이제는 아예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신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신 셈이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모독한 ‘참람죄’였다.
예수님의 행동의 동기는 율법이나 인간의 사고나 경험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율법은 고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법칙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의 뜻이나 행동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해 가시는 분, 당신은 일하시면서 안식일에 쉬라고 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인간이 생명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안식 없는 노동과 탐욕의 길로 갈 수 있고, 군주제와 불평등 체제하에서 착취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 조항에서 자유해야 한다. 물론 이를 악용하여 안식일을 우리의 방탕이나 쾌락 추구의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안 된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고, 진정한 안식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의 동기나 권위의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권주의자들 앞에서도 당당하셨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이 쉬시니 나도 쉰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나도 사랑이다” 이게 예수님의 입장이셨다. 그 예수님이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렇다면 우리 행동의 근거도 하나님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결정, 내가 걷는 걸음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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