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70년 최장수 교수를 역임한 박창환 학장과 장로회신학대학교
(1) 생애와 신학여정
박창환은 첫 주석서인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을 1960년에 처음으로 발간하고, 1961년에 “예수의 생활”을 저술한다. 그리고 1962년과 1965년에 한국 신약학계에 지금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약성서 희랍어 교본”과 “희랍어 사전”을 집필한다. 이 두 책을 ‘희랍어’라고 명명함으로써 지금도 처음 신학을 시작하는 학도들이 구약 히브리어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필자가 “신약성서 헬라어 교분”이라고 책 제목을 바꾸어서 개정신판을 낸 바 있다. 박창환은 1963년에 “신약성서신학”을, 1969년에 “성서형성사”를, 1970년에 “신약개론”을 저술하여 그의 모든 책이 황무지와 같은 당시의 한국 신약계에 교과서와 길잡이가 된다.
박창환은 신학교 졸업과 동시인 1948년 9월부터 장로회신학교의 교수직을 수행하여, 1983년 학장으로 취임하고, 1989년에 정년을 할 때까지 무려 40년을 정교수로 재직하고, 은퇴 후에도 지난 30년 동안 명예학장직을 유지하여 2018년까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초빙교수직을 감당하였으므로, 무려 70년 동안이나 장신대 교수의 직분을 수행한 분으로 장신대 120년의 역사에 교수직을 가장 오래 감당한 분이기에 아마도 세계 신학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70년의 신약교수의 경력’은 전무후무한 진기록이 될 것이다.
박창환은 오산학교를 5년 내내 개근할 정도로 강인한 집념을 가진 분이다. 그러나 그는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에, 먼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1942년에 동경에 있는 제국음악학교에 유학을 간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터지게 되자 남의 나라에서 징병이 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곧바로 귀국하여 1943년 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성경원어공부에 매진을 하다가 1946년에 사선인 38선을 단 한권의 책인 ‘신구약성경’을 들고 월남하여 조선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신신학과 신정통신학의 회오리 속에서 1947년에 소위 51명이 퇴학처분을 받는 혼란 속에서 주모자가 되어 조선신학교를 그만둔다. 그 해에 박형룡을 따라 부산 고려신학교에 학적을 옮기지만, 거기서도 박형룡과 고려신학이 분열되자 다시 상경하여, 따로 장로회신학교에 적을 두어서 1948년에 신학을 졸업한다.
이런 그의 복잡다단한 신학여정을 보면, 그는 해방 전후에 신학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고 국가 이념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뉜 혼탁한 때에 모든 신학교에 다 적을 두고 다양한 신학적 혼란과 갈등의 시기를 온 몸으로 보내면서 한국의 신약학의 기초를 든든하게 세운 분이다.
박창환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를 시작하면서부터 성경원어를 전담으로 가르치며, 1961년부터 1966년까지 대한성서공회의 “신약성서 새번역”을 하는 위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소위 ‘인자 사건’이 발생하는데, ‘인자’를 ‘사람의 아들’로 번역을 한 것을 총회와 이사회가 다시 인자로 환원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도 그가 완성한 “신약성서 새번역”은 한국인의 번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로 회자되고 있다. 이런 그의 성경에 대한 열심은 “성경을 좀 더 깊이 연구하고 좀 더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어떤 심각한 결단인지는 모르지만, 1971년에 돌연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떠나 3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선교의 효시를 이룬 업적도 있다.
사실 박창환은 자서전을 써놓고 있지만, 아직 출간을 결심하지 못하고 있다. 출간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2013년 5월 16일에 있었던 “박창환 학장: 역사와의 대화”에서 질문이 있었지만, 그는 아직 많은 관련자가 있어서 출판을 미룬다는 대답이 있었다. 후대에 그의 자서전에 출판되면 당대의 역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2) 나의 신학(이 항목은 2019년 4월 5일에 96세에도 여전히 강령하신 박창환이 직접 써서 보낸 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신학이 무엇인지 별로 알지 못하는 자가 신학 운운하는 것이 좀 어색하지만, 말해 보라니까, 생각나는 대로 몇 자 적어보려고 한다.
나의 성경관: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나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며 표준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2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옛날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고, 그 모든 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또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말로 적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과 그의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연히 성경에는 불완전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고후 4:7)라고나 할까. 인간의 언어는 모두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불가불 그 불완전한 도구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기록된 성경은 불완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여러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기록하게 한 글들의 총서인데 그것의 원본은 지금 한 조각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다. 성경 원본은 깡그리 사라졌고, 그 사본들과 역본들이 얼마큼 남아 있는 실정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혹은 모자라서 원본들을 남겨놓지 않았겠는가?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좋겠기에 하신 조치라고 생각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숭배(Bibliolatry)의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고 하신 조치라고 생각된다.
성경은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조금씩 원본에서 이탈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전중하는 사람들은 원본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 노력이 과거 수백년 동안 진행되었다. 소위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과 원문비평학(Historical Criticism: Textual Criticism)이다. 나는 그 노력에 동참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자처한다. 1953-4에 Princeton 에서 유명한 Bruce M. Metzger로부터 본문비평학 강의를 들었다. 성경의 절대무오설을 신봉하던 나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시내산 밑에서 양을 돌보고 있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우선 'ehyeh 'asher 'ehyeh라 하셨고, 다음은 ’ehyeh 라고 하셨고, 다음은 Yahweh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어서 우리는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고 본다. 'ehyeh라는 말은 hayah=he was의 직설법 3인칭 단수형 동사이다. 히브리어 동사에는 완료형과 미완료형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미완료 상태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 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기도 하다(ὁ ὢ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 즉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으로서 무시(無始) 무종(無終)의 존재이시다. 반면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해 주시는 순간부터 전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동시에 야훼(Yahweh)이시다. 그것은 היה(he was)라는 동사의 사역형(hi'phil=causative) 미완료 3인칭 단수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케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만물을 존재케 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즉 계속해소 창조작업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하신다는 말이다. 나의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신 분이시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ברא bara') 창조하시며, 이미 만드신 사물을 빚어서(야차르 yatsar) 또 다른 것들을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고, 의(義)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대속의 제물로 내 주시기까지 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경륜(οἰκονομία τοῦ θεοῦ = the economy of God): 하나님은 계획과 설계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다. 엡 1:10에서 보면, 하나님의 “때의 충만의 경륜”이라는 말이 있다. 즉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과 뜻을 가지시고 그것들을 착착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이다. 한글 번역에는 때(καιρός)가 단수로 번역되었는데, 본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여러 개의 때(καιρός)을 설정(設定)하셨다는 말이다. 우선 세 개의 때가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때는 하나님이 물질세상을 만드시기 이전의 시기이다. 둘 째 때는 천지만물을 만드시기 시작하여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셋째는 만물의 종말 이후의 시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적어도 이 세 카이로스를 정하시고 그 매 시기에 하시려는 계획과 설계를 하셨고, 그 계획대로 운영하고 계신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 곳 당신의 집에 대한 계획이 있고 그것의 완성을 향하여 역사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엡 1:10에 의하면 종국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혹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하신 작업들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작업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을 든다면, 우선 아브라함의 가문을 선택하셔서 세상 한 복판에 세우시고 제사장 백성의 역할을 하게 하신 사건이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반역하였으며 마침내, 최후 수단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기까지 한 끔찍한 범죄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념하시지 않고 교회로 하여금 그 작업은 계승하게 하신 것이다. 소위 그것을 대체신학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대체신학을 믿는다. 이제는 세상의 누구든지, 즉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진리이다.
목회에 대한 나의 의견: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오늘의 한국 교회의 문제는 잘못된 목회 이론에 있다고 나는 본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교인들을 많이 모으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착각을 하는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많이 있다. 성경 어디에 교회를 크게 지으라는 말이 있는가?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여도 내가 거기 있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역량은 제한이 있어서 평균 100 명 내지 고작 150 명을 통솔할만한 힘밖에 없다. 목자는 양을 하나 하나 알아야 하고, 양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고 철두철미 돌보아야 한다.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예수의 말씀에 보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βόσκε=feed)고 하셨다. 또는 “내 양의 무리를 치라(ποίμαινε).”고 하셨다. 목사의 손이 신자들에게 골고루 미치려면 교인의 수가 많으면 될 수 없다. 열심히 전도하여 200면 300 명이 되면 분가를 해서 다른 목사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오늘의 대형 교회는 신도들은 영양불량 상태에 있다. 큰 교회 교인이라는 자부심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들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교인들의 이름도 모르고 그들의 깊은 사정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대형교회의 부목사들에게 배당된 교인의 수가 1000 명 단위가 아닌가. 헌금을 많이 거두어 교회당을 크게 짓고, 돈이 남아돌아가 부목사들을 데리고 사치한 외국 유람 여행을 가는 것을 자랑하는 교회들도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 아닌가 말이다. 사회는 교회를 백안시하고 많은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목사들은 구태의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라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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