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일은 간단합니다. 그냥 두면 됩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그냥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감정이 느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어디가 경계선인지도 모를 망가진 포도원이 됩니다. 노력해서 가꾸지 않고 그냥 두는 것, 이것이 관계를 가장 빨리 망치는 비결입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내가 대접받고 싶은 시종을 만들기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혹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사람으로 바꾸기 위한 기도도 아닙니다. 부부를 위한 기도는 부부관계를 방치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꾸어 갈지를 고민하고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결혼할 때는 사랑하여 결혼했으나, 살면서 사랑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에 가장 지혜로운 길임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먼저 사랑하게 하시고, 먼저 다정하게 하시고, 먼저 손 내밀어 안아 주게 하소서.
김민정 – 하나님과 함께하는 부부기도 100
아브람의 나이 구십구 세란, 그가 175세에 죽었던 것을 고려하면(25:7), 아브람의 중년기에 해당합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아브람의 중년기에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2은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을 ‘잉태할 힘을’ 잃어버린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의 나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브람의 처지가 죽은 자와 다를 바 없었던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겠다고 설쳤습니다. 그러다가 구십구 세가 되면서 자기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아브람이 드디어 하나님 앞에 항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로 시작하는 창세기 17:1은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라는 말로 끝나는 창세기 16:16과 견주어 파악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당대의 풍속을 따라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맨 처음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오 세였습니다. 당시의 기준에서 복은 자손들이, 아들들이 쑥쑥(!) 태어나는 일입니다.
왕대일 –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우리는 분노를 관리하며 죄를 짓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분노가 생겨도 거룩한 분노로 성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분노도 오롯이 감정의 요소입니다.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어딘가 이상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분노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입니다. 우리의 감정의 밑바닥에서 진흙을 끌어올리는 듯한 인간적인 분노가 아닙니다. 거룩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분노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 인정하고 회개하며 회복을 구해야만 합니다.
노희송 – 마음 디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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