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복음주의 교회와 목회자가 삼위일체를 단언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를 단언한다. 그러나 솔직히 이들은 “성경이 어디선가 그렇게 말하지 않나요?”라고 말할 뿐(이들은 그렇게 말하는 성경 구절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삼위일체를 단언해야 하는 다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동일한 삼위일체를 성경적 정통에 따라 분명하게 표현하라고 해보라. 멍한 시선이 돌아올 것이다. 당신이라면 삼위일체를 지금 당장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이, 십자가 중심적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신앙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삼위일체의 기본이 복음주의 교과서들에서 잘려 나갔고 복음주의 강의실, 내가 삼위일체를 배워야 했던 강의실의 화이트보드에서 지워졌다는 것은 아무리 줄여 말해도 기겁할 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표류를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튜 바렛 – 정통 삼위일체 교리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생은 도박 같다. 그들은 생존을 ‘운’이나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생존 자체가 쉽지 않으니, 그저 운이나 운명에 삶을 내던지는 것이다. 마치 제비나 탈리를 던져 운명을 정하거나 운세를 보듯이 말이다. 운명의 여신들, 모이라이에게 모든 걸 맡긴다고 할 수도 있겠다. 탈리를 던지는 행위는 신에게 드리는 기도인 동시에 인생을 건 도박이기도 하다. 이 세대의 권세가 승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안다(단 7:12; 고전 2:6). 그래서 성도는 이 세대의 권세가 행사하는 영향력과 유혹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만 달라붙은 채로(롬 8:38-39), 참담하고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견딘다. 그러므로 이 묵시는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는 이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직조한다.
정은찬 – 바울, 마케도니아에 가다
아들이 떠난 날부터 아버지는 늘 아들을 기다렸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아들이 떠나간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매일 같은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가 함께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임을 알려주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임을 깨우쳐 주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참된 행복은 염소에도, 잔치에도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의 행복이었다. 시몬은 만족하지 못했다. 더 성공하고 싶었다. 더 큰 일을 이루고 싶었다. 성공해서 행복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 더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데,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성공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높은 데로 올라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높은 데에 마음을 둔 제자들을 단호하게 다그쳤다. 하나님의 뜻은 높은 데가 아닌, 낮은 데에 있다고 했다.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에게 마음을 두라고 가르쳤다. 그저 낮은 데로 가서 섬기라고 했다.
서진교 – 예수행복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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