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 접어들면서 ‘챗GPT’라는 말이 갑자기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단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보도로 이어지고, 교회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챗GPT에 대하여 교회는 호응이 아니라 경고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AI(인공지능)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상 문화의 상징물로서, 신앙과 영성에 정면 도전장을 띄우는 인간 기술, 변형된 형태의 비영적(非靈的) 에네르게이아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함께 휩쓸린다면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본격적인 인공지능시대의 상징인 챗GPT가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를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금년은 코로나 발병 4년차이다. 정부와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 종식 선언에 갈음하는 발표를 하였지만, 적어도 금년 말까지는 모두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1300년대의 페스트가 가르쳐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페스트는 1347년 발병하여 4년간 창궐하다가, 그 후에도 1665년까지 무려 300년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아마 우리 세대도 죽을 때까지 코로나를 친구삼아야 할 것이다.
역병(전염병)인 코로나는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종족(국가)들 간의 전쟁, 그리고 포악한 지도자 내지 탐욕스런 종교지도자(성경은 이들을 ‘사나운 짐승’이라 한다)와 함께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 특별한 현상이다. 그것은 재앙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제어하기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사람들은 곧잘 그 작용을 신에게 돌렸다. 성경은 그것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수단이라고 명백히 하고 있다.
특히 역병의 경우, 이것이 광대한 지역으로 전파될 때, 즉 온 세상에 펜데믹 현상을 일으킬 때, 때로는 인간의 문명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곤 하였다. 이를테면 중세의 페스트는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한 농경문화시대 및 봉건체계를 공업과 상업이 중심이 되는 현대자본주의사회 및 자유민주주의사회로 변형시켜 놓았다. 그리고 교회도 그러한 변화를 함께 겪었다. 예를 들면, 성직자의 독점물이었던 성경이 페스트를 거치면서 모든 사람의 손에 놓이게 되었고, 초중앙집권적인 교회 체계는 독립적인 개교단 및 개교회 형태로 변형되었다. 종교개혁(1517년)은 페스트가 종료되기 전에, 그리고 산업혁명(1760년)은 페스트가 종료된 후에 일어난 대혁명이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어떻게 변화될까? 농경문화에서 상공문화를 거친 인류의 문명은 AI문화시대로 급속히 변형될 것이다. 1970년 필자가 PC나 스마트폰을 꿈속에서도 보지 못했듯이,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AI시대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인간처럼 감각을 지니고 인간의 두뇌보다 더 똑똑한 인조인간이 등장하지 않겠는가. 사람 대신 AI가 인간의 유전자 배열을 조작함으로써 맞춤형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AI사회는 모든 정보가 국가에 집중되고, 부는 소수에게 집중된다. 따라서 개인의 족보, 성격, 질병이력, 범법행위, 사회이력, 금융정보 등이 자동으로 국가정보시스템에 저장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론조사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특정 세력에 의한 선거 조작도 가능하다. 이런 사회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체주의사회이다. 그렇게 되면 자유와 민주라는 말은 공허한 환상에 불과하게 된다. 교회가 설 자리도 없다. 있다면 욕구 충족을 위한 구색용일 뿐이다. 성경은 그러한 사회를 이미 예상하고 경고한다(계 13:16-18). 곧 적그리스도의 시대인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이다. 노동자란 ‘일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그것을 부여하셨다.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 먹고 산다는 말씀은, 곧 그의 직업이 노동자임을 말한다. 따라서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한 나라의 왕도 노동자이다. 사회는 권력에 의해 질서 지어진다. 그리고 소수가 권력을 독점한 가운데 절대다수는 노동자로 삶을 영위한다. 페스트 이전에 그 노동자들은 농노(農奴)였고, 페스트와 산업혁명 이후 그 형태는 공장노동자들이다. 농경문화에 이은 상공문화는 역사 발전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 과정에는 권력과 함께 부도 양극화 된다. 양극화 문제는 역사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며, 단지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가미될 뿐이다. AI문화시대는 이러한 양극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벌써 AI는 수만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급격히 변경시키고 있다. 따라서 ‘비정규직 철폐’ 같은 노동조합의 구호는 이러한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AI문화시대 교회의 미래를 보자. 설교를 완벽하게 하는 인조인간의 목사, 성경을 사람보다 더 잘 가르치는 인조인간의 교수, 그리고 대형교회의 모든 시스템은 AI에 의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신자는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집안에 편하게 앉아서 인조인간의 유능한 목사와 일대일로 대면하여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 간섭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의 코이노니아(교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대면 교제보다 가상공간에서의 체팅(교제, 소통)을 더 선호한다. 사회봉사 활동? 농경문화시대,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은 공업문화시대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역할을 교회가 유효하게 수행하였다. 하지만 AI문화시대에는 그 역할을 국가가 부담하고 또 부담해야 한다. 사회복지에 대한 관여는 교회 존재의 본질도 아니다.
그렇다면 AI문화시대와 더불어 교회(유형의 교회)는 소멸하고 말 것인가? 아니다. 인간은 물질이 부요할수록 영혼의 갈증을 느낀다. 겉사람이 넉넉할수록 속사람은 영적 허기를 절감한다. 그것을 채워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하는 영혼들에게 물질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영성적인 것을,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을, AI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부여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부르심을 입은 주의 종들은 깊은 영성을 갖출 필요가 긴요해진다. 초대교회시대 사막의 교부들이 닦은 기독교 영성이 세월을 건너 뛰어 페스트시대에 소수의 영성가들을 통하여 다시 꽃을 피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영성이 AI시대에 참으로 요구된다. 장차 AI시대의 교회는 가라지와 알곡으로 나눠지고, 깊은 영성을 소유한 참된 사역자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참된 교회는 그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이 사실을 세상을 향해 경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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