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우남의 인간적 성격
영어 단어에서는 성격과 성품을 구별하고 있다. 성격은 퍼스넬리티(Personality)라고 하는데 이는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고, 성품은 캐릭터(Character)라고 하는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절을 지킴, 좋은 매너, 옷을 입는 형태, 언어 습관, 머리 모양 등은 그 사람의 성격(Personately)에 속하고, 내향적, 외향적, 성실성, 인내심, 진실성과 같은 것은 그 사람의 성품(Character)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대개 성격과 성품이 하나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한 인간의 성격 혹은 성품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성격이란 본능적인 것처럼 태어 날 때부터 가지고 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후천적으로 주변 환경에 의해 학습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성격을 통하여 주변 사람들과 접촉하며 자신의 성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격에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 그리고 성공과 실패가 나뉘기도 한다.
우남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자신은 매우 야심적이고 노력형인 학생’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수준 높은 책들을 모두 외웠을 뿐 아니라 붓글씨도 주야로 닦았다. 우남이 스스로 자신의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스스로를 절제 할 줄 아는 자신의 성격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해진다.
"나는 나 자신의 글씨 연습을 위해서도 그랬고 또 부친의 말씀에 따라 종종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곤 했는데 내가 글쓰기에 열중할 때면 여러 사람들이 내 주위에 둘러서서 보면서 “야, 그 도령 잘 쓴다.”라고 탄성을 지르곤 하였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신이 나고 용기가 북돋아 올라서 서당에서도 서예 연습에 박차를 가하곤 하였다. 이런 일들은 나를 더욱 서예에 정진하게 만들었고 이 예를 닦는데 방해될 만한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우남 이승만의 ‘서예에 대한 비망록’ 에서)
시인 서정주(徐廷株, 1915-2000)는 2년 동안 집필하여 우여곡절 끝에 1949년 10월 삼팔사(三八社)에서『이승만 박사 전』을 전작으로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전기는 출간하자마자 우남의 지시로 발매 금지처분을 당하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이유는, 책 속에 등장하는 우남 집안의 어른들에게 경칭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서정주가 우남의 전기를 쓰면서 어느 정도 각색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우남은 호기심이 많아서 장안에서 각종의 정치적, 군사적 소요가 일어날 때면 거리를 혼자 배회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이승만은 외톨박이였던 것 같다.
서정주가 쓴 우남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때때로 우남은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 날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는 동안 꽃이나 나비 그리고 선생님들의 초상을 그리는데 열중하였다. 나비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의 대상이어서 그의 학교 친구들은 그를 「이 나비」라고 놀려대곤 하였고 그러면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림 그리기이든, 연 날리기이든, 글을 읽던 우남이 한번 열중하면 아무것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는 여가만 나면 2주 동안 삼국지(三國志)를 읽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림을 그리고 나면 또 다른 소설을 그렇게 읽곤 하였다. 그는 학교의 일꾼에게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노래 가사를 적은 노트가 책이 될 정도였다. 또 그는 꽃을 서당의 마당에 옮겨 심는 것을 좋아해서 선생님이 그를 꽃에 빠진 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정주, 『우남 이승만 전』, p. 68-72.)
이러한 글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남이 집중력과 인내력이 두드러졌다는 점과, 주로 혼자서 여가를 보내곤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훌륭한 정서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경험들이 후에 우남을 뛰어난 시인이요, 문장가로도 만들었던 것이다.
우남과 더불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배재학당에서 함께 수학하였으며, 한성감옥에도 함께 있었던 신흥우는 우남의 성격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영어(囹圄) 생활을 하는 동안 승만은 영어(英語)를 일층 열심히 공부하여 영어 실력이 서양인과의 교섭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정도에 달했다. 그가 입감(入監)한지 약 1년 반이 지나서 나도 입감하여 승만과 한 방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층 더 친해졌고 또 동지로서 그를 대단히 숭배 했지만 가끔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본 이승만은 포용성(包容性)이 부족한 것이 결점이었다. 그가 나를 볼 때 내가 중용성(中庸性)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좋지 못하다면서 서로 말다툼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에 반대하면 조금도 용서 없이 화를 내는 성질이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때 나는 격론 끝에 승만의 방에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나는〕그러지 않고 계속 같은 방에 남아 있었다." (신흥우의 일본 책, 『이승만의 語 』p. 284-285. 유영익의 『젊은 날의 이승만』 p.193 주석 부분에서 다시 옮김.)
신흥우는 우남이 영어공부를 열심히 공부하여 영어에 능통하게 된 점 등을 칭찬하면서도, 그가 성격적으로 너무 독선적이라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아 더불어 감방살이하기가 힘들었음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 증언은 출옥 후에 우남의 정치행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남은 조선왕조의 국족으로 태어난 탓으로 어려서부터 높은 엘리트 의식과 호국의 사명감을 속으로 지니고 자라났다. 게다가 집안의 6대 독자였기에 때문에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신분 및 가정 배경이 우남으로 하여금 독존적인 성격을 갖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남은 아버지가 늘 집을 비운 상태에서 집안의 여인들을 보호 대변하면서 자라난 결과 어른이 된 후에 민족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외적에 대항한 ‘수탉 형’의 외향적 성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우남은 부모로부터 특별한 유산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양친으로부터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남달리 영민한 두뇌와 튼튼한 체력을 이어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두 자산을 밑천으로 삼아 학문과 정치의 세계에 도전하여 끈질기게 분투, 노력한 결과 그의 먼 조상 태조 이성계가 도달한 것과 맞먹는 수준의 정치적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우남은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의 인걸이었던 것이다.
우남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한성 감옥에서 1904년 7월 14일에 알렌공사에게 쓴 서한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의 주장이 강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남 자신의 석방을 위해 진력하던 미국의 주한 공사 알렌(H. N. Allen, 1858-1932)에게 우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개서한을 쓰고 있다. 이글에서 우리는 우남의 강한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공경히 아뢸 말씀은 제가 옥중에 있는 몸으로 각하께 서신을 직접 올리는 것이 불경(不敬)한 일인듯 하오나, 관계가 가볍지 않은 사건이 있기에 염치를 무릅쓰고 우러러 번거로움을 끼치는 바입니다. 근자에 듣자오니 각하께서 저를 위하여 일본공사에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하고, 또 외부에 석방도 요청하였다는 소식이 누차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저의 사사로운 분수에 비추어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제가 직접간접으로 청탁한 바가 있어서 그런가 하는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본인의 염원을 저버린 것이요, 또한 각하의 공인(公人)으로서의 체통을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하물며 한국 죄수의 보호를 이웃나라의 공사에게 부탁하는 것은 우리 한국의 독립을 존중히 여기는 본의에 위배되며 귀국과 우리나라의 우의(友誼)를 손상시키는 바입니다. 본인은 차라리 억울함을 품고 달갑게 죽을지언정 이 일만은 참으로 원치 않는 바이오 또한 차마 할 수도 없는 바입니다. 천만 살펴서 헤아리시기를 바라고 또 깊이 바랍니다." (광무(光武)8년 7월 18일, 즉 July 18. 1904.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부록 「국역 옥중잡기」, #6 참조.)
이 서한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미국공사 알렌은 1904년 중순에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우남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였고 동시에 대한제국 외부(外部)에도 우남의 석방을 요구하는 보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남은 이 서한에서 1899년 초 한성감옥에 처음으로 구치되었을 때 알렌의 호의를 사절했던 전례대로 - 외국공사의 도움을 받아 출옥하는 것은 피차 존중한다는 명분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알렌의 뜻을 사절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우남이 1904년, 같은 해 8월7일에 출옥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미 우남은 5년 7개월의 긴 영어(囹圄)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차 존중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렌의 도움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조선인으로 구차스럽게 외국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이고, 또한 명분도 없는 일로 구차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조선의 선비정신 혹은 양반의 기개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보면 그는 자기주장 내지는 자기 고집이 얼마나 강했던 인물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남은 그가 일찍이 배운 유학을 통하여, 또한 아버지의 모습을 통하여 학습된 소위 가부장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 진다. 우남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면서 우남과 평생을 같이한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는『대통령의 건강』이라는 회고록을 쓰면서 우남이 남긴 생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는 우남이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사이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어떤 성품의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신혼 생활을 시작할 무렵, 남편은 나에게 “한국의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나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 받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말했더니, 남편은 무척 대견해 했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값싼 3등 열차나 3등 선실만 골라서 타고 다니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신혼살림도 어렵기는 마찬 가지였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하였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적게 먹으면서도 부지런하고 농담 상대역이 되어 주는 여자로 생각이 되어 아내로 맞았다”고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였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프란체스카 여사의 살아 온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횃불, 2006), p. 27.)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 우남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을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남편은 언제나 특유의 유모로 사람들을 곧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가였다. 사람이 굶을 줄 알아야만 훌륭한 선비이며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 먹는다는 한국의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하였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가난한 생활을 품위 있게 이겨내는 지혜와 절도를 배웠다”
“불로초(不老草)를 든 적이 없어도 80세가 넘도록 젊은이처럼 건강했던 대통령은 남달리 부지런하고 낙천적인 성품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 때라도 한국인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사람들을 웃기고 위로해 주는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건강장수 비결은 허욕없이 편안한 마음가짐과 절도 있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평생을 같이 살아가며 아내의 눈에 비친 우남은 인격적으로 잘 갖추어진 동양의 신사였던 것이다. 우남은 좋은 습관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모든 매너를 알고 지키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늘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자신을 계발해 가는 신앙인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남의 급한 성격을 말해 주는 대목도 문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이런 일은 우남이 결혼한 후에 바로 신혼 때에 있었던 일로 여겨진다. 성격이 급한 우남이 얼마나 빨리 차를 몰았던지 우남이 운전하는 차에는 아내 이외에 누구도 타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이나 방송, 신문 기자와의 약속 때문에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과속이지만 운전이 정확하여 사고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남편의 시력과 판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 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혁명가(革命家)적 기질 탓으로도 보였다. (중략)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말렸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중략) 이때부터 자동차 운전은 꼭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나는 남편으로부터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살았구나 하고 정신이 드는 남편의 차에는 나 이외엔 누구도 타기를 꺼렸다."(프란체스카 도너 리,『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프란체스카 여사의 살아 온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횃불, 2006))
또한 우남은 얼마나 꾸준하게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 그의 생애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남편은 사형수의 형틀을 쓰고 있을 때도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공부를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그런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하고 옆에서 물으면 ‘죽으면 못쓰더라도 산 동안은 해야지... 혹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하고 태연히 대답했고, 나중에는 영한사전 우남이 감옥에서 있을 때에 영한사전을 집필하였다. A-F까지 이루어졌을 때, 러일 전쟁소식을 듣고 나라의 위기를 직감하게 된 이승만은 영한사전 집필을 중단하고 국민계몽을 위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아마도 우남은 이미 어려서부터 늘 한학을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며, 또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지만 늘 학생처럼 열심히 새 단어를 외우고 꾸준히 공부하였는데 이는 80이 넘을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틈나는 대로 붓글씨를 쓰는 노력가였으며 초인적인 정신으로 쉬지 않고 노력하며 일하였기에 남편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었다고 하였다. 우남은 성실하고 가기 계발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지런한 성품이었던 것이다. “남편이 붓글씨 쓸 때는 언제나 내가 곁에서 먹을 갈아 드렸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쉬지 않고 노력하며 일하는 남편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독립운동을 하며 해외여행을 자주해야 하는 우남이 상대국의 비자 발급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30여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 시민권 받기를 거부한 것은 그가 철저한 한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63년 우남은 하와이에서 생애 마지막 노년을 외롭게 보내며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와 우리 노래인 아리랑 그리고 도라지 타령을 부르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그 때에 우남이 마지막까지 기억한 노래는 다음의 노래였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이동욱,『우리의 건국 대통령 이렇게 죽어갔다』, p84)
프란체스카 여사는 『6.25와 이승만』이라는 6.25 전쟁 회고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남편 우남을 회고하고 있다.
"대통령의 구술을 계속해서 받으며 타자를 해 나가는 내 손끝은 모두 부르트고, 눈은 너무나 피로해서 뜰 수가 없다. 나는 염려 말고 쉬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권유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독립운동 중 가장 힘든 고비였던 1941년 대통령의『일본 그 가면의 실체, (Japan, Inside Out)』원고를 세 차례나 타자했을 때도, 손끝이 부르트고 눈이 짓무른 경험이 있다. 당시 대통령은 나를 포토맥 강변으로 데리고 가 나에게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위로해 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별들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시름도 많다.
오다가다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끝 구절은 대통령이 나를 위해서 지어 넣은 가사이다. '이 노래가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여사는 똑같은 내용의 글을『대통령의 건강』이라는 책에도 썼는데, 그 곳에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대통령이 나를 위해 지어 불렀던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 속에 맺힌 한이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여사께서도 독립운동을 하는 대통령을 돌보며 자신도 이미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조선 사람이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남은 수십 년의 해외생활을 하면서도 아리랑을 부르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또 조국인 대한민국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우남은 인생의 많은 우여곡절을 경험하였다. 많은 외국의 고위 관리인들을 상대로 한 삶의 화려함, 그리고 독립 운동가로서의 외로움과 고독, 가난도 경험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년은 결국은 조선의 고향,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우남이 하와이에서 마지막 인생을 쓸쓸하게 보내며 즐겨 부르던 이와 같은 노래는 그가 늘 사랑하던 조국의 토속적인 것이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상징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리의 건국 대통령 이렇게 죽어갔다』라는 책을 써서 하와이에서의 우남의 마지막 생애를 그린 작가 이동욱은 우남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이는 평소에 청렴하고 알뜰하기로 소문난 우남 내외가 마지막 노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박사가 귀국을 위해 노력했던 눈물겨운 모습은 망명생활 중 곳곳에 배어있다. 5달러 하는 이발 비를 아껴 여비를 모으기도 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박사의 머리는 보기 싫을 정도로 길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이발을 해드려야 했다. 매주 금요일은 부인이 한 주일분 식료품을 사들이는 장보는 날. 그러나 이 박사는 부인에게 시장엘 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굶어서야 살 수가 없지 않아요”하고 설명을 하면 “그러면 조금만 사와... 돈 써버리면 서울 못 가...”라고 말하며 겨우 놓아주곤 했다. 시장을 보고 온 부인은 항상 작은 봉투 하나만 들고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작은 봉투를 들고 이박사 앞을 지나서 부엌으로 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남편을 안심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곤 부엌에 달린 뒷문을 통해 나머지 물건을 몰래 들여놓아야 했다. (...)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이 박사의 귀국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그럴수록 자신의 희망이 관철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도 덩달아 커져갔다. 한번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여기 데려다 붙잡아 두고 있는가 하는 거야!”하며 격분했다. 흥분을 절대하지 말라고 부인이 애원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박사는 이날 상기된 표정이 되어 혼잣말을 계속 이었다. “온 천하에 못된 놈들... 그 놈두... 그 놈두. 웬 도적놈이 그다지 많아... 어떻게... 그런 것을 저질렀단 말이야?... 내가 도적놈인가? 나는 본시 가난한 사람이야... 돈을 어찌 해?... 기가 맥혀...” 그리고는 혈압이 올라 두통을 호소하며 몸져누웠다. 마키키가의 집에서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이 박사는 트리풀러 병원에 들렀다. 당시 ‘그레고라토스’라는 희랍계 미국인 의사가 이승만 박사의 주치의였다. 이박사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 자꾸 건강이 안 좋다”고 하자 주치의는 뇌파검사를 제안했다. 뇌파검사가 끝나자 두 모자를 별실로 불러들인 주치의는 뇌파검사 결과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이상 희망이 없음’을 전해주었다. (이동욱,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 p. 66.)
유영익 박사는『청년 이승만』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남의 성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남은 천재였지만 몇 가지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남은 능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두뇌가 우수하고 건강이 절륜인데다가 남다른 노력가였기 때문에 잠재력이 탁월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동서당에 도강(都講: 종합경시)에서 항상 장원을 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한지 반년 만에 학당의 영어 조교사로 발탁됨으로서 20세 이전에 이미 주위 사람들로 부터 천재,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갑수, 『偉人 李大統領 傳記 』,(서울: 李承晩博士傳記 普及會, 1955)p.12, 이승만과 함께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신흥우는 이승만의 자질에 대해, “Rhee had splendid memory -very superior student" 라고 평하였다. 올리버 수집, 이정식 소장문서, ”Conversation: Hugh Cynn," p.2.)
그는 한문과 영어에 모두 뛰어 났는데, 그 가운데 탁월한 영어 실력이야말로 그가 지도자로서 나설 수 있는 주된 무기였던 것이다. 그는 언론인 혹은 저술가로서 필재가 뛰어났다. 그는 한성감옥에 투옥되기 전후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동년배 가운데 가장 앞서는 문필업적을 쌓았다. 그의 신문 논설들은 박학한 내용에다 비판의식을 곁들인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 간에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우남은 웅변에도 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협성회(協成會, The Mutual Friendship Society),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그리고 중추원 회의 등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정치 선동가 혹은 기독교 전도사로서 잠재력이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남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에게 접근하여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 즉 사교술이 남들보다 앞섰다. 그가 미국 선교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의 사교술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애국 애족심 그리고 기독교적인 메시야 의식 내지 선민의식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업적을 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우남은 역사에 보기드믄 천재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몇 가지 성격상의 결함이 있었다. 집안에서 6대 독자로 애지중지 자라난데다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 천재로 칭찬에 익숙해 있어서 그는 만사에 완벽주의였고, 유아독존(唯我獨尊)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좋게 보면 자신감이 넘쳐 있었고 나쁘게 보면 자만심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자만심은 때때로 육친이나 선배의 호의적인 권고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기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거나, 포용하지 못하는 독선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에게 자신의 업적을 과대 선전하는 자과벽(自誇癖)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한 예로서 그는 자기의 한성감옥 복역기간(5년 7개월)을 설명 할 때, 아전인수 격의 음력 계산법에 따라 실제로는 5년 7개월 임에도 불구하고 - 6년 반 혹은 7년으로 과대 홍보하였던 것이다. 20대의 청년 이승만에게 보이는 이러한 성격상의 흠 또는 결점은 30대 이후 그의 험난한 인생역정에서 점점 더 불거져 그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해 동안 우남의 사료를 연구한 유영익 박사가 자신의 글,『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생활 (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를 탈고하면서 바라 본 우남의 성격은 지극히 정확하고, 바른 것으로 여겨진다. 우남은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성격상 유아독존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속>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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