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동총신 증경총회장 최철호 목사
최철호 목사(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장, 예장 합동총신 증경총회장) ©합동총신

흔히 우리가 말하는 ‘꿈’은 일반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 주기적으로 꾸는 꿈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할 때 dream이라고 합니다. 이런 꿈은 어떤 원인으로 인한 놀라운 일도 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개꿈도 있습니다. 어떤 원인으로 인한 꿈은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에 대한 심리적 요인이 흔히 작용한 결과입니다. 놀랍게도 그러한 경우, 꿈은 의식 가운데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그 꿈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답의 길이 보이기도 합니다. 개꿈은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여튼 우리가 보통 꾸는 일상적인 꿈도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감각 없이 향유하는 놀라운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꿈이 신학적으로 해석될 때 그것은 좀 심각해집니다. 성경에서 ‘꿈’םולח할롬이란 용어가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곳은 아브라함과 그리고 가나안 땅의 그랄 왕 아비멜렉 사이에서 있던 한 사건 가운데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꿈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꿈은 요셉이 꾼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요셉의 꿈을 수없이 우려먹습니다. 이러한 꿈들은 대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시적인 꿈을 선지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아비멜렉이나 애굽의 바로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처럼 선지자가 아닌 경우에도 계시적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젊은이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큰 꿈을 꾸라”고 하면서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의 꿈은 dream이라기 보다는 vision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전vision이 구약의 언어로는 ‘마하제’הזחמ입니다. 이는 “보다, 보여지다”란 뜻으로 ‘환상, 이상’으로 번역됩니다. 즉 선지자가 황홀경 가운데서 하나님 보여주시는 계시를 시각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꿈은 대화가 있지만 환상은 대화가 없어 해석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흔히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왕이면 큰 꿈을 꾸라”는 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자신이 쓴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보다도 사귐에 대한 자기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본래 뜻하는 바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꿈같은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을 교만하고 건방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꿈으로 그려 보는 사람은 하나님이나 남이나 자기에게 자기의 꿈을 이루고자 요구하게 됩니다. 그는 요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사귐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법을 세우고는, 그것을 따라 형제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심판합니다.”

나는 신학교 강의 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도 여러분, 목회에 대한 꿈을 꾸지 마십시오.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설교 잘해서, 교회 건축하고 교육관도 짓고 하겠다는 그런 꿈일랑 꾸지 마십시오. 세계를 내 교구로 삼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종 된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교만이요 욕망입니다. 종은 오로지 주인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십시오."

목회자는 내가 설계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꿈(그것이 오늘날에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내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종들에게는 내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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