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칼빈'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적 지성과 신앙적 영성을 겸비한 길송(吉松) 이종윤 목사가 지난달 29일, 올림피아 중앙장로교회(담임 우경철 목사)에서 워싱턴주 지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가졌다.
이 목사는 자신의 목회 길을 반추하며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라는 자신의 목회 이념과 복음주의적 신앙관을 전했다. 이종윤 목사는 세미나에서 할렐루야교회 개척 이야기부터 충현교회에 부임과 역경, 서울 교회 개척과 교회 부흥의 원동력 등에 대해 자세히 풀어놓았다. 기사 전개는 세미나의 질의응답 내용을 가지고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편집자 주)
◆ 한국 할렐루야교회 개척 이야기
"고등학교 1학년 때 목사가 되기로 소명을 받았다. 소명을 받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50세까지는 티칭 목회를 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목회를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국 교회에서는 나이가 권위를 나타냈다. 30살 목회자가 어떻게 아버지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겠나? 그래서 50세까지는 가르치는 일로 신학교육을 하고 그 이후에 목회를 하겠다고 서원했다.
1975년도에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귀국했다. 당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는 아시아 지도자를 배출하자는 뜻으로 세운 학교로, 초대 이사장에 한경직 목사, 학장에 마펫 박사, 부학장에 한철하 박사가 있었다. 한철하 박사의 간곡한 권유로 학교교수로 부임했다. 학생 4명에 교수가 5명일정도로 초창기였는데, 사람이 부족해 교무처장, 학생처장을 겸했고, 카타로그도 만들었다.
그러다 1980년도에 성경공부를 인도하다가 신동아 그룹 최순영 장로와 인연이 됐다. 최 장로는 함께 교회를 개척하자고 했다. 땅을 사놨고 교회 이름까지 지어놨다고 했다. 50세까지는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했기에 수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개척을 고집하는 최순영 장로로 인해 학교에 청빙사실을 알렸더니, 부학장이던 한철하 박사가 무릎을 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했다.
한철하 박사는 당시 학교에 최순영 장로를 이사로 모시려 했는데, 최 장로는 당시 순복음 교회 집사였다. 한경직 목사님이 순복음 교회를 인정하지 않아 당시 이사로 모실 수 없었는데, 이 박사가 최 장로와 함께 개척해 학교 이사로 모시자고 했다. 그렇게 할렐루야 교회 개척이 시작됐다."
◆ 할렐루야교회에서의 목회는 어땠나?
"1980년 12월 24일, 7사람이 할렐루야 교회를 시작했다. 최 장로 식구하고 우리 집 식구하고 시작을 했다. 그런데 한 달이 되니까 100명이 됐다. 두 달이 되니 200명, 석 달이 되니 300명, 넉 달이 되니 400명이 됐다.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문제가 안됐다.
그러다 이듬해 4월 미국에 기금모금차 방문하고 왔더니 교회 인원 100명이 줄어 있었다. 100명이 줄고나니까 아찔했다. 빠진 100명을 채우는데 그 해 말까지 가야했다.
그때 터득한 내용이 있다. 교회는 성장할 때 계속 성장해야지 시험을 받거나 유혹에 빠지면 일으키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는 유기체이기에 한번 부딪히면 회복하기 어렵다. 꾸준히 성장하는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
◆ 할렐루야 교회 부흥의 원인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7년 반 동안 그 교회에서 시무했다. 그 기간 동안 할렐루야 교회는 장년만 2천 5백 명이 넘어서는 급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특별한 원인은 없다. 심방 한번 하지 않았다. 신학 교수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주일날 설교만 전했을 뿐이다. 그 때 터득한 것이 '결국 목회는 설교'라는 것이다. 목회는 설교지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공이 신약학이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교회에 와서도 잘 전할 수 있었다. 교인들이 잘 소화시키도록 풀어서 가르치니까 교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교인들이 많다고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교회는 부흥을 이뤘다."
◆ 갑자기 충현교회로 부임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모교회가 충현교회였다. 김창인 목사님 밑에서 세례를 받고 결혼 주례도 받고, 중생을 체험했을 만큼 놀랍도록 큰 은혜를 끼친 분이셨다. 김 목사님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렐루야 교회를 사임할 당시 할렐루야 교회도 큰 교회가 됐지만 교회 성도들의 반대가 심했다. 할렐루야 교회 장로들은 내가 제출한 사표를 돌아가면서 반씩 찢어 날리면서 사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반대가 심했다.
충현교회 부임은 김창인 목사님의 간청에 할 수 없이 끌려가게 됐는데, 교회에 가보니 빚이 너무 많았다. 원래 충무로 5가에 있던 교회가 강남에 큰 땅을 사,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다.
빚이 어느 정도였냐면 건축 부흥회를 1주일 동안 하고 작정헌금까지 포함시켜서 37번을 해야 빚만 해결 될 정도로 큰 빚이 있었다. 게다가 건축비는 따로 또 필요했다. 그러니 엄청난 액수가 필요한 것이었다. 현장에 가보니 공사하는 소장도 사라졌다. 인부들이 임금이 밀려 일하길 거부했다.
그러다 청와대에서 까지 전화가 왔다. 88올림픽이 내일모레인데 강남의 대로 한 복판에 웅장한 건물을 지으려고 기둥만 세워놓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야단이었다. 당신들 집을 헐든지 빨리 세우든지 해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 충현교회 건축 이야기
"1987년 4월 1일 충현교회로 부임했는데 그 때부터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새벽기도회에서 강대상 뒤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마음에 무슨 기도가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 제 앞에 홍해가 있습니다. 이 홍해를 어떻게 건너야 합니까?'라는 기도였다. 그 주일, 당회 보고도 하지 않고 6월 6일이 현충일이었는데 그때부터 40일 동안 홍해 작전을 한다고 공포했다. 장로가 70명이었는데 누구 하나 의논하지 않았다.
왜 홍해 작년이라 했냐면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뗏목을 만들지 않았다. 수영하지 않았다. 모세가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무릎 꿇고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고 말씀대로 했더니 홍해가 갈라지고 승리의 쾌가를 부를 수 있었다. 우리 앞의 홍해도 모세처럼 건너가자는 의미에서 홍해 작년이라 명명했다.
새벽 5시에 교인들을 오라고 해놓고, 7가지 기도제목을 나눠줬다. 모든 교인들에게 기도 제목을 나눠줬다. 전교인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것이다. 홍해를 건널 때는 어린아이도 건너야 한다. 아픈 사람도 건너야 한다.
88년도에는 자가용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는데, 첫날 새벽 5시에 3천명이 왔다. 둘째 날에는 3천 5백 명, 계속 참석인원이 늘어나더니 나중엔 만 명이 넘게 왔다. 서울 시내 택시가 다 몰려 올 정도였다. 강북에 사는 교인들은 버스를 대절해서 왔다. 인천, 수원 등지에서 대절해온 버스가 교회 마당에 꽉 차 있었다.
그렇게 40일 동안 홍해 작전을 했다. 특별한 것은 없고 사도행전만 가지고 조용히 말씀을 각론한 것뿐이다. 그리고 기도를 계속했다. 홍해 작년 40일을 마치고 나니 전체 빛의 80%가 해결됐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전혀 없었다.
홍해 작년 마치고 곧이어 여리고 작전에 들어갔다. 교구별로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밖에 없었다.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그해 12월 20일, 마침내 헌당식을 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 충현교회 헌당 이후 고통의 시간도 있었다. 어떻게 견딜 수 있었나?
"지금은 그 때의 오해가 전혀 고통이 되지 않는다. 당시 사건이 터지고 바로 교회를 사임했다. 계속 남아있다간 교회가 갈라지게 될 형국이었다. 바로 비행기 타고 미국 볼티모어의 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 때의 2-3일은 정말 내가 예수 믿지 않았다면 자살을 했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서 살 이유가 없을 정도였다.
목사로서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가짜 목사라고 신문에 내고 하는데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어디를 가서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욥기서를 수없이 읽었다. 고난을 모두 찾아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새벽 3시에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한 구절에 시선이 고정됐다. 세례요한이 목 베어 죽임을 당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보고한 부분이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산으로 가시다' 그 말에 시선이 멈췄다.
새벽 3시에 잠들어 있는 친구와 예배를 드렸다. 내가 너무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예수님이 들으시고 보셨을 것 아닌가? 예수님이 보셨고 들으셨는데 된 것이 아닌가?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를 써야 하는가? 하나님이 보셨으면 된다는 평안이 찾아왔다. 그 때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다.
핍박과 환란이 왔다고 넘어지면 마귀만 좋아하지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 서울 교회 개척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자마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교수 임용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었다. 절차는 15일이면 마치니 보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피하려고 호텔도 안가고 친구 집으로만 다녔는데, 어떻게 알고 전화가 왔다. 할렐루야 교회에서 충현교회로 떠나 온 교인이 절에 갔다는 말을 듣고 야구 방망이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길로 삭발을 하고 귀국 했다. 공항에 300여 명이 나와 있었는데 그 분들이 벌써 교회를 세워놨었다. 그게 서울 교회다.
당시 앞에도 교회, 옆에도 교회인데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울 이유가 없었다.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를 섬기는 교회를 세우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렇게 서울 교회 담임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 교회가 강남 한 복판 대치동에 12층 건물을 짓고, 빨리 성장한 이유가 있다. 해답은 기도와 말씀 그리고 특별히 꾸준한 구제에 있었다. 옥합을 깨뜨린 것이다. 남이 볼 때는 낭비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낭비다. 많이 내보내자란 결심으로 처음부터 교회 예산의 60%를 밖으로 내보냈다.
다른 교회를 위한 교회였기에 우리가 할 일은 정말 많았다. 미자립 교회를 후원하고, 전 세계 145개국 교회를 지난 20년 동안 섬겼다. 내가 한 것은 오로지 성경적 설교와 열렬한 기도, 꾸준한 섬김이다."
◆ 몇 년 전, 고 김창인 목사와 사제 간의 관계를 회복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용서가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 목사님들에게 용서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발을 씻으셨다. 전능하신 예수님이 가롯 유다를 모르시겠는가?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발을 씻으셨다. 다 용서 해야 한다.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그러나 용서해야 한다.
김창인 목사님을 찾아가서 생활비도 드리고 어버이날에는 서울교회에서 설교로 모셨다. 그렇게 했더니 마음이 평안하고 더 기쁜 것이다.
우리가 1만달란트 탕감 받은 죄인이다. 1만 달란트가 얼마인가? 그 당시 유대인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낸 세금 액수가 800달란트다. 1만 달란트 라는 금액은 개인으로는 갚을 수 없는 액수다. 우리는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액수를 탕감 받은 죄인이다. 우리가 그 심정으로 목회하면 억울하거나 분할 이유가 없다. 다 용서가 된다. 그 보다 더 큰 죄도 용서 받았는데, 하나님 앞에 감사 할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