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대표 스티브 셀러스)의 한국 대표로 사역하고 있는 박성민 목사가 최근 CTS의 프로그램 ‘내가 매일 기쁘게’에 출연해, 자신의 신앙과 섬김, 그리고 앞으로 CCC의 사역에 대해 나누며 간증했다.
박 목사는 CCC에 대해 “아내를 만나고, 함께할 친구를 만났으며 지금까지 일해온 곳”이라며 “CCC는 나의 모든 것이며,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박 목사는 CCC가 1951년에 빌 브라이트 박사가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캠퍼스가 혼돈의 시대 속에서 미래의 리더를 바로 세우기 위해 창립했고, 1957년에 빌 박사가 김준곤 목사와 만나서 1958년에 한국CCC가 창립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CCC는 캠퍼스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이 굉장히 다양하다”라며, 어린아이 전도, 목회 리빌딩, 교회 전도 사역과 양육, 광주지구에서 노인사역과 호스피스 사역 등의 사역이 동반하고 있는 것도 소개했다.
이어 “그 이유는 우리가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니다. 캠퍼스 사역을 섬기는 동안에 꿈과 비전을 받는 것이다. 부르심의 영역 속에서 어떻게 사회로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비슷한 사람들이 만나면 우리(CCC)가 그들의 울타리가 된다”라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학교까지 연결되며, 심지어 파키스탄에서는 병원까지 운영한다”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CCC에서 훈련을 받은 졸업생이 40만명 정도 되며, 사회 각계각층에서 역할을 하고 있으고 꿈과 비전이 맞는 사람은 다양한 일들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박 목사는 장인 어른인 ‘故 김준곤 목사’에 대해 “김 목사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립다. 목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대학생 때 이성적인 사람으로 감성이 약했던 사람인데, 김 목사님께서 이성을 터치하시면서 감성도 살려 주셨다”라고 했다.
이어 김 목사에 대해 ‘손주인 나의 아이에게 장난을 잘 치셨던 분’, ‘예수님 얘기만 하면 눈물을 글썽이셨던 분’, ‘CCC의 간사들을 항상 생각하며 살뜰히 챙기셨던 분’, ‘사위인 나에게도 늘 존대하며 존중해 주신 인격적인 분’ 등으로 묘사하며 “나의 삶의 모델이셨고, 가르치는 멘토셨다”라며 “항상 그립고 감사하다”고 했다.
#성장 배경과 CCC에 입문
박 목사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전체에서 첫 번째로 예수를 믿게 됐으며, 고등학생 때 중창단에 활동했다. 중찬단에 함께 참여했던 선배가 CCC였다. 그 선배를 통해 CCC의 ‘청소년 선교회’ 격인 ‘하이 CCC’를 알게 됐으며,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자연스럽게 CCC를 참여했고, 여름수련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박 목사가 참석했던 그 여름수련회는 성량을 만들기 위해 미르나무 숲을 빌려서 여름수련회를 진행했었다. 김준곤 목사는 밤에 모든 불을 끄고 백사장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김소월 시인의 ‘예전에는 미쳐 몰랐어요’라는 시를 외며 말씀을 전했다.
김준곤 목사는 그곳에서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쳐 몰랐다”라며 “왜 우리가 여기에 왔겠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살다 가겠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셨다”고 말했었다. 박 목사는 그 말씀을 들으며 “그전까지 CCC에서 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바로 그날에 그 달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 아내와의 만남과 유학
대학교 때, 박 목사와 사모는 신촌에 각각 인접해 위치한 두 대학을 다니며 활동반경이 자주 겹쳤다. 그래서 가까워졌으나, 박 목사는 아내가 김준곤 목사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불교적 배경을 가진 박 목사와 아내의 집안 배경에 차이가 있기에 판단해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그렇지 못 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항상 묶어주셨다”라며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었기에 갖이 만나며 친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 목사는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으며, 아내와 대학을 졸업 휴 유학을 하고 돌아와 각자의 모교에서 지도교수를 하며 CCC를 섬길 것을 약속하고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 아내는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 한 신학교의 교수가 박 목사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대해 도움을 청하며 친교를 가지게 됐다. 박 목사는 신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아내와의 교제를 더 깊게 하기 위해, 또 교류하는 박사를 통해 신학을 친근하게 접하게 됐고, 그래서 5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신학을 박사과정까지 마치게 됐다.
박 목사는 이에 대해 “신학을 너무 즐겨서 공부 했다”라며 “나는 그래서 그 학교에서 석박사를 가장 짧은 시간에 이수한 사람이 됐다”고 했다.
박 목사는 ‘목사가 돼는 것에 대해 김윤희 사모가 반대 했던 이유’에 대해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는 캠퍼스 젊은이들을 섬기기 위해 교수가 되길 생각했었고, 목회자가 되면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김윤희 사모가 목회자의 자녀로서의 중압감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았고, 김준곤 목사님도 ‘목사는 잘 생각해 봐라, 가는 길이 쉽지 않다’고 했었다”라며 “그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목회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목사안수를 받는 것이 좋다고 격려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 ‘CCC의 대표가 됐던 계기’
박 목사는 싱가폴에서 사역하던 도중에 고 김준곤 목사가 한국 CCC를 도우라고 했다. 그래서 1999년 ‘엑스플로’라는 사역에 참여했다. 인천대학교 운동장에서 집회를 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수선하고, 비를 맞으며 집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학교 교실에서 숙박을 했는데, 추워하고 너무 힘들어 했다.
그래서 박 목사는 이것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에 대해 김준곤 목사에게 건의했다. 그 결과 박 목사는 2000년부터는 콘도에서 수련회를 진행 했고, 이 일을 박 목사가 직접 추친했다. 그 과정 속에서 고 김준곤 목사와 다른 간사들이 박 목사를 신임하게 됐고, 국제 CCC에서도 박 목사의 교육 배경 등 여러 상황을 고려, 검증과 평가과정을 거쳐 박 목사를 김준곤 목사의 후임으로 선정했다.
# CCC의 사역에 대해
동아시아 책임자가 된 것에 대해, CCC는 미국에서 시작했지만 한국이 2번째로 규모가 크기에 국제 CCC에 기여 할 수 있는 많은 여지가 있고, 그래서 국제CCC에서 박 목사에게 많은 요청이 있었다. 박 목사는 이에 대해 “CCC에 대한 부르심도 있지만, 더 중요하 부르심은 민족에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라며 “한국을 떠나서 국제CCC를 섬길 수 없다. 그래서 한국CCC를 섬기며, 동아시아의 총재를 겸하게 됐다”고 했다.
또한, 한국CCC에는 2가지 큰 수련회가 있다. 여름과 겨울수련회이다. 여름수련회에서는 한국 장기기증협회와 연결해 부모님의 동의 하에 학생들이 장기기증을 서약한다. 겨울수련회에서는 학생들이 금식을 하며, 그동안의 식비를 가지고 레바논의 폭파 사건, 아프리카 우물 지원, 혹은 북한 지원 등 지원이 필요한 세계적 이슈에 헌금과 지원을 한다.
박 목사는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맞는 전도 접근법인 코전어(코리아 전도 어플)와 메타버스의 활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코전어는 어플을 통한 전도 영상 소개와 정기적 기도시간을 갖기 위한 알람과 기도제목의 구체적 내용 제공 등의 기능이 있어서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형국의 사역에서 도움을 줄 수 있던 어플이다.
또한, 인간관계에 미숙하고, 디지털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현 학생들의 특성으로 메타버스의 아바타 뒤에 숨어 사회적 생활을 하는 학생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메타버스에 통해 학생들에 접근할 필요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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