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신학회(회장 소기천 박사)가 3일 오후 서울 심애교회(담임 이철수 목사)에서 제151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철수 목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이라는 주제로 설교했으며, 3명의 발표자가 각각의 주제로 발제했다.
김수연 박사(이화여자대학교 Ph.D)는 “두 현실의 화해:디트리히 본회퍼의 ‘현실’해석에서 그리스도론의 자리”를, 이강일 박사(서울장신대)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한 연구”를, 안호진 박사(캐나다 세인트 마이클 칼리지 Ph.D)는 “비폭력 속죄 이론에 관한 신학적 비평”에 대해 각각 발표했다.
논찬으로는 김성호 교수(서울신대), 이상은(서울장신대), 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등 총 6명이 참여했으며,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가 강평했다.
특히 이강일 박사는 그의 발표에서 흔히 선교단체로 이해되고 있는 교회병행단체(para-church)와 교회의 관계성 모델, 사상적 배경, 교회병행단체의 기원과 역사적 흐름(영국을 중심으로), 그리고 한국교회의 선교단체들에 대한 소개와 ‘자원주의 정신’ 등에 대해 발표했다.
이 박사는 “교회 주위에 교회병행단체(para-church)가 다양한 선교단체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교회병행단체는 교회로부터 물적, 인적 지원을 받아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주로 감당하며 선교사역에 협력해왔다. 그러나 서로에게 긴장을 주는 순간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현대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성립한 후 줄곧 두 구조가 존재했으므로 사실은 역사적인 유래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선교단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신은 ‘자원주의’(Voluntarism)이다. 이 정신은 모든 교회 모임이 초기 단계에 교회병행단체 성격을 보일 때 드러나는 정신이기도 하다. 자원주의 정신을 중심으로 기독교 모임의 시작을 살펴보면 모두가 일종의 교회병행단체의 순간을 경험한다. 어떤 교회구조이든 한동안 자원주의 정신의 임시 단체로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자원주의 정신을 공유하는 이중적 구조라면 지역 교회와 선교단체 양자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신뢰감 있는 협력관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교회병행단체와 교회의 관계 모델’에 대해 “다수의 신학자들은 선교적 기능을 교회가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면 교회병행단체의 임무는 소멸될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 기능을 인정한다는 ‘임시구조론’을 지지한다. 한편 선교를 경험한 선교학자들이나 선교단체 관계자들은 교회병행단체의 선교기능의 항구성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교회와 교회병행단체의 ‘이중구조론’ 입장에 선다”고 했다.
그는 ‘교회병행단체의 강조점’에 대해 “교회병행단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복음전도’(evangelism)이다. 일반 교회도 공통적으로 그 기능을 인정하는 부분이다. 타문화권 선교가 주된 설립 동기였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교회병행단체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두 번째는 교육이다. 19세기 수많은 교육기관들이 자원협회(association)로 설립되었다. 교파의 요구에서 최대한 독립해있던 교육기관은 무디성경대학이나 휘튼 대학, 고든 대학 등이 있다. 세 번째 강조점은 ‘복음주의’ 신학 노선이었다. 대다수 대학생 선교단체가 특히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20세기 초반 세계 대학생 선교단체인 WSCF(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이 보여준 모더니즘 신학 경향에 반대하면서 학생복음전도를 위한 목표에 집중하려는 대항적 성격의 선교단체인 IVF(Inter-Varsity Fellowship of Evangelical Unions)가 새로 설립되었다. 네 번째는 인도주의적 사회참여이다. 기아나 재난 구호와 사회정의 요구에 반응하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교회병행단체의 분화 및 변형’을 설명하며 “가장 역동적인 분화와 변형을 보여주는 것은 감리교 계열 사례이다. 감리교는 처음에 성공회 안에 교회 안의 교회 모델로 존재하다가 웨슬리 사후 감리교파로 분화, 독립했다. 감리교 전통 안에서 성결운동을 전개하던 그룹이 다시 성결교파가 되었다”고 했다.
이어 “교회조직은 이처럼 1세기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 없이 단일교회 구조로 이어진 것 같으나, 처음부터 지중해 연안에 교회 문화권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5개 교구로 나뉘어 있었고,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는 동방교회와 라틴교회로 분립되었으며 로마가톨릭교회도 종교개혁 이후 수많은 분화는 거듭되어 올 만큼 변화가 역동적이다. 개별교파나 교회병행단체도 고정된 채로 있지 않고, 분화, 독립, 합병, 전환 등 모든 변화 가능성을 실현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자원주의 정신의 실천사례’ 에 대해 “당시 영국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왕권이 의회의 강력한 견제를 받으면서 사회적 자율성의 공간이 열려있었다. 거기서 사업, 학술, 종교 등의 목적으로 다양하게 조직되고 있는 자원단체들에 주목했다. 자유로운 모임이 많이 생길 때, 개인의 재산권 등을 보장하는 등의 사회적 선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는 ‘관용’(toleration)으로 이런 자원모임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로크는 영국의 국교 중심 사회가 장차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후원하는 교회 구조가 많아진 사회로 변화될 것을 예견했다. 모든 교회는 자원단체이며, 사회는 종교적 관용을 보장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훗날 북미 기독교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구현되었다. 기독교 자원주의 정신과 근대 세속적 자원주의 정신이 합류하여 강화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이어 “먼저 웨슬리(John Wesley)는 독일 경건주의자들과 청교도 그리고 로크에게 자원주의 신학의 빚을 졌다. 그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행’(good works)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믿음이 협력해야 가능하다고 믿었다. 한번 구원을 맛보면 선행의 열망을 갖게 됨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자원모임 후원과 참여는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성장하면서 자선 사업에 대한 자원주의 정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훗날 감리교도들은 자기 모임을 통해 사회참여를 실천하는 것, 다른 자선조직을 후원하는 등 자원주의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했다.
또한 “복음적 칼뱅주의자로 평가되는 침례교도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는 기독교인 자원주의 발전에 논리적 단계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데 감화력있는 설교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분히 자원주의적이고 근대 계몽주의적 관점이 배어 있는 주장이다. 회심의 효과를 내는 것이라면 어떤 도구든 사용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는 계몽주의적 유래가 있는 인간의 능력과 수단들이라 해도 복음전파를 위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선교후원금이나 십일조를 낼 것을 촉구하는 등 침례교 신학의 자원주의 정신은 캐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한국의 자원주의 정신과 교회병행단체’에 대해 “일제 강점기에 추방되었던 미국 선교사들이 미군정의 요청을 계기로 재입국하면서 선교사역을 재개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는 국제구호단체의 봉사활동을 통해 개신교 복음주의선교활동이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시작했다. 교회 재건과 분열의 과정에서 교회목회와 선교의 대상에서 소외되어 있던 엘리트 대학생에 대한 선교활동의 필요성도 증대했다. 대학생 선교단체는 바로 이 배경 속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대학생 선교단체들도 제도화의 흐름은 피할 수가 없다. 과거 웨슬리 운동도 그 엄청난 성장 때문에 감리교파로 독립한 전례도 있다. 한국의 성결운동도 일찍이 선교단체에서 성결교파가 전환되었다. 그러나 교파로 전환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교회병행단체로 머무는 경우도 많다. 다만 일정한 제도화는 불가피하다 보니 다수의 선교단체들이 ‘기성 종파’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박사는 ‘한국교회와 교회병행단체의 관계’에 대해 ‘긴장 구조’와 ‘연합과 성장’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자원주의’에 대해 “두 차례에 걸친 미국 선교사들의 자원주의 선교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선교 초기 SVM운동 출신 선교사들의 자원주의 정신이다. 한국개신교의 선교 초기 형태는 선교사의 신학과 자원 사역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들은 세대주의적 종말론 신앙과 청교도적인 태도 그리고 초교파적 연합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두 번째는 1950년대 영어권에서 활발했던 대학생선교단체 사역을 통한 것이었다. 이들 사역자들은 대학생을 위한 전도와 양육에 집중했다. 평신도 사역자가 일반 대학생들에게 기독교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기독대학생들은 초교파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대학 캠퍼스의 학생선교사 활동을 하면서, 교회병행단체 특유의 자원주의 문화를 체득하였다.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은 선교단체의 평신도 남녀 사역자에게도 영향을 받은 바 있어, 교회 목회자만을 유일한 영적 리더십으로 제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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