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밤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로 우리 사회가 온통 슬픔에 잠겼다. 온 국민이 156명이나 희생된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희생자를 애도하는 분위기다.
정부가 11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하자 여야 정치권은 국민적인 추모 분위기를 위해 정쟁의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이 아파하고 서로를 위로해야 할 시간에 누군가는 희생자를 모욕하고 또 누군가는 이런 국민적 슬픔조차 정파적으로 이용하려 든다.
국가적 재난이 일어났을 때 1차 피해자는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부상자들이다. 이들에 대해선 국가와 사회가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 못지않게 2차 피해 또한 심각하다. 온 사회가 집단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 게 바로 그런 경우다.
재난은 재난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이로 인해 파생된 문제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낳기도 한다. 재난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분노를 일으키고 그 분노가 엉뚱하게 희생자와 부상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부 언론이 책임론을 꺼내면 정치권이 이를 곧바로 받아 희생양 만들기에 돌입한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수 일이 지나도록 추모 분위기는 식지 않고 있다. 반대로 SNS에는 이태원 희생자를 비난하는 글과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도 난무하고 있다. 보다 못한 경찰은 “고인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행위와 개인 정보 유출 행위 등 온라인상 허위 사실 유포 행위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는 크고 작은 재난 때마다 있었다. 그때마다 검경이 엄중하게 대처하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문제는 이런 집단 공격이 희생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물론 온 국민을 재난 트라우마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 일수록 국민 스스로 행동을 절제하고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 이번 이태원 참사를 과거의 세월호 사고와 연관시키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우려스럽다. 여야가 정쟁을 중단하고 추모와 사태수습에 힘을 모으기로 한 약속이 무색할 정도다. 일부 정치인들이 개인 SNS 또는 방송에 출연해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 등의 책임론을 거론하자 진보성향의 시민단체들이 정권 퇴진운동의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건 재난을 정파적으론 이용하려는 일부의 시도를 거부하는 운동이 온라인 등을 통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점이다. 이른바 ‘참사의 정치화’에 반대하고 순수하게 애도하고 추모하자는 운동이다. 전문가들은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재난이 터질 때마다 가짜 뉴스를 동원한 정치적 선동이 이어졌고 이런 부작용으로 우리 사회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던 것에 대한 일종의 자정(自淨)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박종석 정신과 의사는 모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이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 제발 제발 멈춰주십시오. 온 국민이 경건히 피해자와 가족을 위로해야 할 이 시기에, 이미 누군가 그리한 것처럼 또 누군가는 분명히 이 재난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 다른 정당을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것이기에 두렵고 개탄스럽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번 주말 도심에선 또 다시 대규모 집회가 예고돼 있다. 대선 직후인 올 4월 출범해 줄곧 윤석열 정권 퇴진 등을 주장해 온 단체인 ‘촛불행동’이 주말인 5일 이태원 참사 애도를 위한 도심 집회를 열 계획이다.
본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국노총이 먼저 노동자 집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전격 취소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족들의 슬픔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다. 한국노총이 취소하자마자 ‘촛불행동’ 측이 곧바로 집회 신청을 했다. 반정부 시위를 추모시위로 성격을 바꾸겠다는 건데 과연 순수한 추모집회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던 날 도심에선 진보단체인 ‘촛불행동’이 주최한 윤 대통령의 퇴진 촛불집회가, 인근에선 보수단체가 주최한 주사파 척결 국민대회가 각각 열렸다. 보수·진보단체 집회에 각각 6~7만 명이 모이면서 경찰 인력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충돌사태를 대비하는데 온통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행안부 장관과 경찰청장에 대한 책임론이 비등하나 따지고 보면 이런 단체들의 책임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태원 참사 직후 교계는 모든 행사계획을 중단 또는 취소했다. 30일 주일 오후 대통령실 인근에서 열려던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 폐지 촉구 기도회와 11월 5일 서울 광화문과 시청광장에서 예정됐던 ‘코리아퍼레이드’는 연기됐다. 1일 예정됐던 한교연 주최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애도기간’이 지난 11월 10일로 옮겨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는 기도회’로 열기로 했다.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대규모 행사 일정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동원되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건 곧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정에도 교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계획을 취소했다. 우선순위가 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국가애도기간’에 도심에서 벌어지는 집회와 시위가 희생자 추모집회건 반정부 집회건 그 성격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은 안타까운 참사에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안타까운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간이다. 어떤 집회든 온 국민의 슬픔이 어느 정도 추슬러진 다음에 하는 게 희생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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