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간사
홀리라이프 김상우 간사. ©노형구 기자

먼저는 나를 키워주시고, 기다려주시고, 기도해주신 존경하는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으로 제 곁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여성보다는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애정과 설렘을 느꼈습니다.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는, 조금 위험한 모험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게 타고난 것이며, 나중에 남들과는 다른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마저 가지며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던 저는, 육체와 정신이 성장함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의 참사랑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몰래 누리는 음행과 쾌락에 눈이 먼 자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동성애와 욕정이 예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중독 같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쾌락의 이중생활과 함께 점점 고뇌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20대부터 교회에서 청년부 활동을 해왔습니다. 찬양이 좋았고, 목청껏 기도하는 청년부 선배들을 보며, 저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철야 금요예배 때, 저는 고요하고도 비밀스러운 마음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짧은 찰나에 제가 계속 갈구하던 동성애가 “죄”라는 명확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4장의 “씨 뿌리는 비유”의 이야기에 나오는바 같이 돌밭 같은 제 마음에 말씀과 기도 생활이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저는 이전보다 더 깊이 그것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 이후에도 여전히 찬양의 멜로디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고, 간간이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이중생활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수년전 까지, 저는 크리스천이면서, 직장인이었고, 동성애자였습니다. 누구도 제게 동성애자라는 굴레를 씌운 적이 없고, 수근 댄 적도 없지만, 스스로 규정한 제 모습이었습니다.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나 외로움을 육체의 욕정으로 해소하고, 낯선 만남을 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허무한 행위들에 사로잡혀 살던 저는 그 시절의 감정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살을 에는 듯한 허망한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제 결심과는 다르게 이끌리는 육체의 속성에 “차라리 떳떳하게 동성애자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매번 혼란을 겪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다가도 밤만 되면 밀려오는 유혹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속으로 빠져들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죄에 빠지면, 사람은 위축되고 공격성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가장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가족들을 만나도 불편하고 주눅이 들었고, 오히려 그분들께 분노가 표출되는 저를 보며 상반되는 마음과 행동에 무척 괴로웠습니다.

당시에 저는 괴로울 때마다 해외의 동성애 극복 간증을 찾아보며 아주 작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죄에 빠진 후에도 허탈함을 달래려 “약할 때 강함 되시네”의 작곡자이자 탈동성애자인 데니스 저니건의 간증등을 보며 어떤 위로를 받으며 잠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한국인이면서, 그리고 목사님이 어떻게 저런 고백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

동성애가 대세로 떠오르는 이 판국에 사실은 좀 부담스러우면서도, 불편한 외침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기억하기로는 4년 전 연말, 죄에 허덕이던 저는 이제는 이 분을 한번 만나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괴로움이 가시지 않을 때, 지푸라기 같은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생각보다 매우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었고 그날 저녁, 곧바로 상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첫 만남은 생각보다 편한 마음이었습니다. 이 분도 나와 같은 아픔을 가졌던 분이라는 것이 큰 위안이었던 거 같습니다. 예전엔 동성애자 세계라는 소수에 발을 들이며 위안을 얻었다면, 이제는 그보다도 더 소수인 탈동성애자라는 그룹을 만난다는 것이 무언가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목사님은 고린도전서 6장 9-11절 말씀을 펼치며, 저의 이 생활이 계속된다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란 것을 명확히 알려주셨습니다.

왜 전 이 말씀을 보지 못 했을까요? 아니 깨닫지 못 했을까요? 제가 스스로의 죄를 은밀하게 꽁꽁 싸매고 있던 것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 한 구절의 말씀이었지만, 제가 머뭇거리던 부분에 성경이 명확히 어떠한 말을 하고 있는지 가르침을 받았던 그 순간, 동성애 문제로 항상 혼란을 겪던 저의 불안한 자아가 깨침을 얻었던 거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분을 통해서 말씀으로 저에게 알려주고 계셨습니다.

그 후로 4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나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동안, 하나님은 제게 비밀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주셨고,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주셨습니다.

영상감독인 저는 자연스레, 교회에서 진행하던 동성애 사역과 관련된 영상을 만들게 되었고 이를 위해 많은 행사와 일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퀴어축제에 관람자로 참여하던 제가 이제는 그때와는 다른 입장으로 교회의 사역에 참여하게 되며, “반동성애, 극단적 반동성애, 탈동성애, 퀴어 진영”을 넘나들며 촬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딘가에 속해 있으며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20대 중반 시절의 친구들이 퀴어 페스티벌의 본부 쪽에서 무리를 형성하고 트럭 위에서 여장을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 제게는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한 시간을 겪으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퀴어 축제에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 반동성애운동을 펼치며 내건 문구들이었습니다. 죄에서 영혼을 구하려는 그분들의 처절한 절규도 이해가 갔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너무도 거칠고 아픈 말들이었습니다.

퀴어축제에 대응하여 우리가 해야 할 고민들에 대해 제가 느낀 것들을 제 나름대로 문서와 영상으로 정리해보았고, 목사님은 그것들을 적극 수용해 주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제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란 자만도 있었지만, 목사님과 함께하며 배운 것들을 단순히 저의 기능으로 풀어 놓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약함과 실패가 예수 안에서는 자랑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비를 체험한 저는 교회와 목사님을 돕는 일을 멈춰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들은 다른 교회에 자랑하거나 보여주려는 메시지도 아니고,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목사님과 함께, 우리는 “나와 같은 고민을 겪는 한 영혼”을 위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행사를 매년, 기획 중에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가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밖에는 해결 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죄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 또한 확신합니다. 무엇이 부끄럽습니까? 수많은 죄 가운데 내 과거가 어찌 되었던 그것으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일 만큼 자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게 육체의 가시 같은 이 죄의 문제가 있으므로 저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매일 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제게 간증이고 감사입니다. 저는 이 비밀스러운 기쁨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제가 그랬듯이 제 간증이 누군가에게 소망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17)

김상우(홀리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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